나를 떠나보내는 글쓰기

또 한 껍질의 포장지를 뜯고 있다

by 유수진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고 했다. 부모님은 물론 동화책이 그랬고, 텔레비전이 그랬고, 이웃집 아주머니도 그랬다. 선생님이 '모여라'라고 말씀하시면 사십 여 명의 학생들이 우루루 한 곳으로 모였고, '이거 시험 문제에 나온다'라고 말씀하시면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메모했다.


사회 구성원으로 살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결정된 규칙'들을 만난다. 이미 결정된 규칙에 따른 결과, 정말 좋은 영향만 받았을까? 나는 훌륭하신 선생님들 아래에서 좋은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라왔다. 그러나 휴대폰이 보였다는 이유로 허벅지 전체가 시퍼렇게 멍이 들만큼 당구대로 맞은 것은 억울했고, '시험 문제에 나온다'는 부분만 공부한 결과, 지금 내게 남아있는 교과 지식은 그다지 많지 않다.


임제선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생각을 형성해왔던 절대적인 관념이나 권위, 사상과 관습을 의심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라는 의미다. 선생님의 말씀을 기본적으로 잘 따라야 하지만, 설사 나의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부분까지 억제 당하면서 누군가의 명령을 무의식적으로 따라선 안 된다. 임제선사는 격하게 '죽여라'라고 표현했지만, 나는 그와 비슷한 말로 '떠나보내라'고 표현하고 싶다.


떠나보내야 할 것은 나의 밖에도 있지만 나의 안에도 있다. 나에게 나 자신만큼 절대적인 관념과 습관으로 똘똘 뭉친 것(?)은 또 없을 테니까 말이다. 나로 태어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점점 더 견고해진다. 나는 원래 까칠한 사람이니까, 나는 원래 부족한 사람이니까, 라며 끊임없이 같은 색깔의 포장지로 나를 덮고, 또 덮는다. 태어나기 전부터 그랬던 사람인 것처럼.


'원래'라는 말이 꼭 불가피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나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나에 대해 글을 쓰려면 '원래의 나'와 '글을 쓰는 나'를 분리해서 '글을 쓰는 나'가 '원래의 나'를 관찰해야 하는데, 이 과정을 거치다보면 나라는 사람이 낯설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평생 까칠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것을 글로 나타내자니 무형의 까칠함을 어떤 모양으로 표현해야 할지부터 막막해진다. 머리를 쥐어짜고 비틀어서 무언가를 써내다보면 문득 '내가 까칠한 게 맞긴 맞나?'하는 의문이 든다. 까칠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삼십 년만에 놀라운 반전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내 몸은 내가 안다며 기어이 병원에 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 건강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멀찌감히 떨어져서 보면 반드시 병원에 가야한다는 걸 알 수 있지만, 본인은 자신이 환자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몸이든, 정신이든 나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려면 나를 멀찌감히 떠나보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덮고 또 덮어온 똑같은 색깔의 포장지를 뜯고 또 뜯다보면,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새로운 색깔의 나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또 한 껍질의 포장지를 뜯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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