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쓰지 않을 것인가

처치곤란해진 물건처럼 의미없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면

by 유수진

스물 아홉에 처음으로 화장대를 구입했다. 그 전까지는 책상 위 선반에 화장품들을 올려놓고 썼는데, 문득 다른 여자들처럼 예쁜 화장대를 한 번 가져보고 싶었다. 립스틱은 립스틱끼리, 섀도우는 섀도우끼리 색깔별로 가지런하게 정리해놓은 화장대를 꿈꿨다. 화장대를 채우려고 새 화장품을 구입하기도 했다. 화장대를 구입한 지 1년이 지난 지금, 내 화장대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화장품 샘플이 어지럽게 쌓여있고, 화장품이 아닌 온갖 것들이 화장대의 영역을 차지해 터지기 일보직전의 상태다. 이럴 바에 오히려 화장대가 없을 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 무엇을 두고, 두지 않는가 하는 선택은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을 바꾼다. 그런데 나는 늘 '무엇을 둘 것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무엇을 두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길을 가다 예쁜 옷을 발견하면 큰 고민없이 샀고, 내 몸뿐만 아니라 방에도 향기가 나면 좋을 것 같아 디퓨저를 두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옷으로 차고 넘치는 옷장과 향기는 나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디퓨저를 볼 때마다 오래동안 비우지 않은 꽉찬 쓰레기통을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답답함이 밀려왔다.


글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기 전에 '무엇에 대해 쓸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많지만, '무엇을 쓰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공간을 채우기 위해 '무엇을 둘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무엇을 두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먼저 필요한 것처럼,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무엇을 쓰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먼저 필요한 것이다. 괜히 구입했다가 처치곤란해진 물건처럼, 의미없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무엇을 쓰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나의 고민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글은 쓰지 않겠다.


나를 포함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글이라면 글을 쓰는 이유가 없다. 아무도 읽지 않더라도 나를 조금이라도 성장시켜주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글쓰기라 믿는다.


- 두 번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글은 쓰지 않겠다.


두 번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글은 횡설수설과 다를 바가 없다. 곱씹어 읽을 만큼 좋은 글이어서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처음 문장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글만큼은 쓰고 싶지 않다.


- 새로운 시선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은 글은 쓰지 않겠다.


글쓰는 사람에게 관찰력은 매우 중요하다. 똑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르게 볼 줄 아는 시선이 있어야 자기만의 글을 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나 다 하는 뻔하고 값싼 이야기만 떠들게 된다.


- 고민 없는 글은 쓰지 않겠다.


나는 보통 한 편의 글을 쓰는 데 두 시간에서 세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고민하는 데 드는 시간이 거의 대부분이다. 엄청난 에너지를 들이다보니 때때로 조금 쉽게 쓰고 싶다는 약한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글을 다 쓰고 나면 다시금 깨닫게 된다. 들인 고민의 시간만큼 좋은 글이 나온다는 것을.


- 나 자신에게 부끄러운 글은 쓰지 않겠다.


위의 모든 규칙들은 남들에게 좋은 글을 내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에게 부끄러운 글을 쓰지 않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글이라면, 남에게도 부끄럽지 않다.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버거운 날엔, 위 규칙들을 꺼내봐야겠다.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얼마나 귀여운 고민인지를 상기시켜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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