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여행의 시간>
경기도민에게 서울에 가는 건 여행이나 다름이 없다. 안양에서 삼청동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춘천에 가는 시간과 맞먹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울에 참 많이도 놀러 다녔다. 서울로 대학을 다니고, 직장에 다니는 데도 날씨가 좋은 주말만 되면 아무리 피곤해도 '서울 정도는 나가줘야지' 하는 이상한 발동이 걸렸다.
그래서 내 청춘의 기억은 서울 곳곳에 남아 있다.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날 서촌에서 삼청동까지 걸어 다니며 온몸의 땀을 다 빼고, 명동 쇼핑거리를 수십 바퀴 돌며 옷을 사고, 한강 앞에 앉아 라면을 먹고,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한남동 루프탑에서 별을 보며 맥주를 마셨다. 그렇게 서울에서 한참 빨빨거리다 왕복 세 시간이 걸려 집에 돌아오면 완전히 녹초가 됐다. 그래도 서울에서 사 온 아기자기한 물건들과 찍어온 사진들을 보면 그렇게 뿌듯하고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그게 바로 서울의 맛이었다.
어차피 여행의 시간은 짧다. 그러나 여행을 품은 인생의 시간은 길다. 여행이란 당장 눈앞의 새로움을 즐기는 시간만은 아니다. 여행길이 끝나도 여행의 기억은 시시때때로 떠오른다. 때로는 미소로, 때로는 이불킥으로, 때로는 떨리는 가슴으로, 때로는 격정적인 감동으로, 때로는 지적 호기심으로. 그렇게 여행의 여파는 인생 내내 간다. - 김진애, <여행의 시간> 중에서
어제 회사 동료가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가 어디냐고 물었다. 내가 지금까지 갔던 국내 여행지 중 가장 소요 시간이 길었던 소매물도나 청산도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먼 곳에도 가봤다 하는 자부심이랄까? 그런데 사실 소매물도와 청산도에 어떻게 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는 길이 힘들고 고단했다는 것과 경관에 감탄한 찰나의 순간들 말고는 딱히 기억에 남는 게 없었다.
꼭 집에서 먼 여행지라고 해서 기억에 오래 남을까? 물론 먼 곳으로 떠났던 여행들이 남긴 추억들도 어마어마하지만, 먼 곳으로 떠난 여행들은 여행 기간이 그리 길지 못하다. 멀리 간만큼 몸은 피곤하고, 간만에 간 여행이니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즐겨야 한다는 압박감에 마음이 여유롭지 않다. 반면, 서울 여행은 먼 곳으로 떠난 여행들에 비해 횟수도 훨씬 많고, 늘 ‘최근’ 여행지이니 기억도 잘 난다. 언제든 또 올 수 있으니 마음이 조급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내 기억 속에 오래 머무는 여행지는 서울인 것이다.
서울에 나가본 지 오래된 엄마가, 2~30대 시절 서울 어디에서 친구와 만나 차를 마셨다는 이야길 할 때가 있다. 몇십 년도 지난 이야기인데, 엄마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러면 나는 아가씨 시절의 젊은 엄마가 가진 옷 중 가장 예쁜 옷을 입고 친구와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흑백 화면처럼 스치고, 그 위로 지금의 내 모습이 드리운다. 지금 서울에서 친구와 함께 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마시는 별 것 아닌 일상의 여행이 엄마처럼 몇십 년 후에도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에 남을까?
평일에는 4호선에서 2호선으로 환승하기 위해 사당역에서 내리지만, 주말에는 4호선을 타고 좀 더 위로 올라간다. 동작역 바깥으로 한강이 보이면, 평일에는 느끼지 못한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느껴진다. 자주 가는 길이라 잘 느끼지 못했지만, 나는 매주 서울로 여행을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 살지 않는 이상, 서울에 놀러 가는 일은 점점 더 드물어질지도 모른다. 시간도 시간이고, 체력도 체력이고, 무엇보다 나와 함께 빨빨거리고 서울 이곳저곳을 다니던 사람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각자가 사는 곳에 중심축을 더 깊게 내리게 될 테니까. 그래도 괜찮다. 마음만 먹으면 서울 정도는 혼자서도 언제든지 갈 수 있으니. 아무리 피곤해도 가끔씩 서울 정도는 나가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