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함을 멈춰!

by 유수진

"4~5시쯤 서울역에서 보자"

"저녁때쯤 연락할게"


약속을 잡을 때마다 만나는 시간이나 장소를 모호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4시에 보자는 건지, 5시에 보자는 건지 물으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라고 말한다. 회사에 다니거나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에 더 이상 따져 묻지 못했지만, 늘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거나 연락을 기다리는 쪽은 나였다.


생각해 보면 나라고 상황에 따라 달라질 변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약속 시간을 '4시' 혹은 '5시'로 명확하게 설정하는 이유는 상대방에게 모호함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4시로 약속 시간을 정했지만 교통 상황 때문에 10분 정도 늦어질 것 같으면 3시 50분쯤 "미안하지만 10분 정도 늦을 것 같으니 근처 카페에서 기다려달라"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다리는 쪽은 언제 올지 모를 상대방을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10분 정도 기다려주는 작은 배려를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부란 무엇인가>의 김영민 저자는 "모호함은 때로 권력자의 무기"라고 말했다. 회사들은 면접을 마친 뒤 지원자들에게 "곧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도대체 언제 연락을 줄 것인지 정확하게 언급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연락이라도 주면 다행인 것이, 합격자를 제외한 탈락자들에게는 아예 연락을 주지 않고 채용 시스템에서 자동 탈락처리 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간절한 마음으로 연락을 기다리는 이들은 '오늘 연락이 올까? 내일 연락이 올까?' 하며 불안감에 잠 못 들 수밖에 없다.


'주어'도 없이 애매모호하게 업무를 던지는 리더들도 있다. 그렇게 하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을 시키는 입장이긴 하나 본인도 그 업무에 대해 구체적으로 잘 알지 못하거나 누가 스스로 일을 맡겠다고 말할지 지켜보겠다는 권위의식을 내세우는 모양새다. 눈치 보는 팀원들 사이에서 누군가는 하는 수 없이 먼저 손을 들고 그 일을 맡겠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일을 행할 실력이 없는 리더에 대한 가여운 마음 때문이다.


나는 요즘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불안해지고 있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신림역에서 칼부림이 났다는 끔찍한 뉴스를 본 게 엊그제인데, 이번엔 또 서현역에서 칼부림 사건이 일어나 10여 명이 크게 다쳤다. 잠실역, 강남역, 오리역... 여기저기에서 칼부림을 하겠다며 예고글이 올라오니, 사람들은 혹여나 내가 사는 근처에서 또 이런 사건이 일어나진 않을지 걱정하며 문밖을 나서기가 꺼려지는 것이다.


연일 터지는 사건 사고의 뉴스에서는 '사형 제도를 부활시키자', '사회로부터 격리시키자' 등 반복적으로 보이는 국민들의 댓글을 볼 수 있다. 나는 결국 이 모든 것들이 모호함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외침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모호하면 모호할수록 불안감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모호한 세상을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주어, 목적어, 서술어가 명확한 구체적인 계획과 대응이 필요하다.



이 콘텐츠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일글레터'입니다. 일글레터는 마케터이자 책 <처음 쓰는 사람들을 위한 글쓰기 특강>,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를 출간한 유수진 작가가 매주 수요일 아침에 무료로 보내드립니다. (구독하기)

일글레터.pn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왜 가이드에 따라 이행하지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