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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Feb 03. 2024

제주도에 갇혀 있다가 탈출했습니다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지난주, 제주도 여행을 갔다가 급격히 날씨가 안 좋아져 그만 제주도에 발이 묶여버렸습니다. 위 뉴스 소식의 주인공(?)이었죠. 갑작스러운 결항 소식에 그야말로 멘붕이었습니다. 계획했던 3박 4일간의 여행 내내 날씨가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제주도에 있던 지인은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잘 도착했다고 했거든요. 서둘러 다음날 비행기 편 예약을 알아보았지만 이미 모두 매진이 되어버렸고, 설사 운이 좋게 비행기 편을 구한다고 해도 내일은 비행기가 뜰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죠.


생각해 보면 시작부터 불안했던 여행이었습니다. '가장 좋은 날'에 '가장 좋은 곳'으로 여행 가고 싶었던 저는 숙소도, 비행기도 번복해 예약을 마쳤어요. 그 과정이 번거로웠지만 직장인에게 단비와 같은 여행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쯤은 감수할 수 있었어요. 여행 날짜가 다가올 때쯤, 제주도 날씨를 검색해 보니 3박 4일 내내 날씨가 흐리거나 눈비가 내릴 수 있다고 나오더라고요. 여행을 미룰까도 싶었지만, 숙소 예약을 취소하면 환불을 50% 밖에 받지 못한다는 답을 받았어요. '에이, 설마 3박 4일 내내 비가 내리겠어?'하고 어쩔 수 없이 떠나기로 했죠.


그런 저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날과 셋째 날에는 온전히 서서 걷기 힘들 만큼 바람이 거세게 불었어요. 날씨가 좋았다면 귤 따기 체험도 하고, 해안도로에 차를 세워둔 채 걷고 싶은 만큼 마음껏 걷고, 멋진 인생샷도 많이 건졌을 텐데 날씨가 좋지 않으니 즐길거리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죠. 


게다가 결항까지 되어버리니 저는 당황스러웠어요. 갑자기 회사에 연차를 이틀이나 더 내야 할지 모르는 상황도 부담이었지만, 무엇보다 저는 저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 능통하지 못한 사람이거든요. 숙소도 갑자기 하루 더 연장을 해야 했고, 딱 3박 4일 치만 챙겨 온 옷과 생필품들을 어떻게 할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했어요. 우선 회사에 저의 소식을 알렸는데, 저를 잘 아는 한 동료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저를 걱정하며 이렇게 말했어요.


"수진님의 틀을 깨는 챌린지라고 생각해 봐요"


생각해 보면 제 아무리 걱정을 한다고 한들 강풍을 뚫고 비행기가 뜰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갑작스러운 결항 때문에 불편한 건 고작 숙소를 연장하고, 입었던 옷들을 며칠 더 입고, 부족한 생필품 없이 이틀을 버티는 것뿐이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이 '챌린지'가 쉽게 느껴졌고, 어느 정도 안정감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다행히도 결항이 된 그날 저녁, 항공사에서 다음날 대체편을 준비했다는 연락을 주었고, 다음날 저는 다소 아슬아슬했지만(?)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강풍이 부는 제주

"거 봐요. 내가 여행 취소하라고 했잖아요"


제가 날씨 때문에 여행을 취소할까 말까 고민할 때, 여행을 취소하라고 권유했던 분이 말했어요. 4박 5일 내내 강풍이 부는 제주도에 갇혀 있었다고 하니 '망한 여행'이라고 생각한 거죠. 어쩌면 저 역시 이런 '망한 여행'을 피하려고 숙소와 비행기 편 예약을 번복해 가며 고민을 했던 거겠죠.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저는 하나도 아쉽지가 않았어요. 오히려 생각지 못한 길로 흘러갔던 상황들이 즐거웠달까요. 큰 변함없는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도 모든 것들이 계획된 대로만 흘러갔다면, 이번 여행처럼 즐겁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주도에 수없이 많이 가봤지만, 저는 이번의 제주를 특히 잊지 못할 거예요. 귤 따기 체험을 하러 갔다가 체험을 할 수 없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간 카페에서 만난 고양이 '토리', 가급적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려 간 산방산 탄산온천에서의 인생 첫 온천 경험, 집 근처 귤 가게가 문을 닫아 운전중 우연히 멈춰 선 한 가게에서 만난 호탕한 주인아주머니와의 대화, 평생 맞아본 바람 중 가장 센 강풍을 뚫으며 깔깔깔 웃어댔던 시간들이 모두 나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은 덕분에 만난 소중한 기억들이 될 테니까요.


가끔씩 인생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그날의 제주가 많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제주의 한 카페에서 만난 고양이 토리와 함께



이 콘텐츠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일글레' 입니다. 일글레 구독 하시면 매주 수요일마다 이메일로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일글레는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회사원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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