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쓸게요, 남의 이야기

[남의 이야기 까발리기]

by 유수진

작가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남의 이야기 까발리기]



에세이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등장시키곤 합니다. 내 이야기만 쓰기엔 한계가 있잖아요. 재미도 없을 거고요. 길을 지나가다 본 모르는 사람도 간혹 등장하지만 대부분 내 주위 사람들입니다. 멀어져봤자 아는 사람 건너 아는 사람 정도겠죠. 그들의 이야기를 쓰기 전에 "너 좀 빌려 써도 될까?"라고 물어본 적은 없어요. 이름을 밝힐 것도 아닌데 굳이 미리 양해까지 구할 필욘 없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함부로 한 말에 상처를 입은 적이 있어요. 살면서 그런 적이 어디 한 두번이겠습니까마는, 꽤 오래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글로 풀어냈어요. 물론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지나치게 상세한 사실을 드러내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주위 사람들은 익명의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내가 겪은 일을 알고 있으니 글에 등장한 사람이 누군지도 쉽게 유추해볼 수 있겠죠. "A라는 사람, 그 사람이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덜컥 걱정이 앞섰어요. 고작 며칠 뒤 다시 그 사람과 하하호호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나를 얼마나 지조없는 사람으로 보겠어요.


에세이라는 게 읽을 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글일지 몰라도 쓸 때는 가볍게 쓸 수 없는 글이라는 걸 느껴요. 쓰면 쓸수록 더 강하게요. 특히 남의 이야기를 쓸 때는 더 그래요.


내 글에는 J언니가 자주 등장해요. 직장에서 만난 J언니는 지금까지 내가 '일'에 대해 바라봐온 시각을 완전히 뒤집어준 사람이에요.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불쑥 튀어나온 아이디어를 조직의 중한 일로 만들어나가는 언니를 보면서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그 전까지 나는 조직이 만든 틀 안에서만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나만 알기 아까운 사례니 당연히 글에도 자주 등장시킬 수 밖에 없었는데, 글을 쓸 때마다 조심스러웠어요. 아무리 좋은 사례라 할지라도 내가 해석한 바가 완전히 틀릴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굉장한 실례일 테고요.


나쁜 사례건 좋은 사례건 남의 이야기를 까발릴 땐 신중을 기해야 해요. 그 누구도 글에 등장한 실제 인물이 누구인지 모른다 하더라도 남의 이야기의 주인은 결국 남이니까요. 그러나 작가로서 남의 이야기를 까발리는 일은 피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남의 이야기를 까발리는 명확한 의도, 나만의 시각, 제 3자에게 전달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이름없는 뒷담화에 그치고 말겠죠.


미리 양해를 구해야겠습니다. 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영감을 받고 살아가는 작가입니다. 당신이 언제 어떻게 내 글에 등장하게 될지 몰라요. 당신을 글로 쓰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근질합니다. 대신 허황된 조미료없이 느낀 그대로 당신을 쓰겠다는 것, 이것 하나는 약속드릴 수 있어요. 나쁜 영향이든 좋은 영향이든 글의 영감을 불러일으켜 나를 작가로 만들어주는 당신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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