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가라앉히기]
작가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감정 가라앉히기]
나는 감정의 길이가 긴 사람입니다. 하나의 감정을 오래도록 복기한다는 뜻이에요. 당신과 처음 손을 잡던 때를 몇 번이고 다시 떠올리고, 너무 화가나서 잠 못 이루던 밤을 테이프가 다 늘어지도록 되돌려보는 거죠. 좋게 말하면 진중하고 나쁘게 말하면 뒤끝있는 사람입니다.
감정의 길이가 긴 건 여러모로 쓸모없습니다. 남들은 벌써 다 잊고 지나갈 일을 가지고 혼자 청승맞게 눈물바람 짓는 일이 다반수라니까요. 그러니까 내 감정 리듬에 맞추는 일은 꽤 어려울 거예요. 평생 같이 살아온 엄마조차도 내 감정 리듬에 두손 두발 다 들었으니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은 사슴이고, 감정의 길이가 길어 슬픈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길고 긴 감정의 길이를 달고 사는 내가 가장 힘들단 말이죠. 무엇보다 글쓰기에 방해가 된다는 점이 가장 거슬립니다. 글을 쓸 때는 슬프고 화나는 감정뿐만 아니라 기쁘고 설레는 감정마저 방해가 되거든요. 가슴이 두근대서도 안되고, 울화가 치밀어서도 안돼요. 글을 쓸 땐 오로지 글에만 집중할 수 있게, 감정의 무게는 0g 으로 충분합니다.
감정의 길이가 길다고해서 글쓰기를 포기할 순 없잖아요. 감정이 요동치는 날엔 은은한 조명만 켜둔 채 요가매트를 펼칩니다. 요가매트 위에 가부좌 자세로 앉아 명상을 하기도 하고 스트레칭으로 온몸의 뻐근함을 날립니다. 들숨과 날숨, 이완되는 근육에 집중하다보면 무거웠던 감정이 잠깐이나마 증발돼요. 감정의 소리가 잦아든 이 틈을 타 글을 씁니다. 이 시간만큼은 당신과 처음 손을 잡던 설렘도, 잠 못 이루던 분노도 비집고 들어올 수 없어요.
감정의 길이가 긴 건 여러모로 쓸모없지만 곱씹는 만큼 감정의 폭도 깊어집니다. 당신과 천 번 만 번 손을 잡아도 여전히 손을 잡는 일이 특별하게 느껴지고, 아무리 화가 나도 무턱대고 삿대질을 하려들지 않는 건 곱씹고 되돌아본 덕분이에요. 그런 면에서 뒤끝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내 말에 동의한다면 한 번 말씀해보세요. 그때 왜 그랬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