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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Jan 06. 2019

첫 키스만 50번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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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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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첫 키스만 50번째>는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루시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헨리의 사랑을 그린 영화입니다.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듯, 루시는 매일 헨리와 처음 만난 사람처럼 사랑에 빠지고 그와 '첫 키스'를 합니다. 키스를 할 때마다 매번 첫 키스를 하듯 설렌다면 낭만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뒤에서 고군분투하는 헨리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만땅으로 채워졌던 사랑이 잠에서 깨어나고나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마니, 또다시 통성명부터 시작해야 하거든요.


나도 매일 첫 키스를 합니다. 무슨 말인고하니 글을 쓰고 수정한다는 말이에요. 글을 마무리할 때쯤이면 눈꺼풀이 무거워져 얼른 마침표를 찍고 눕고 싶어요. 쿨하게 노트북을 덮고 스르륵 잠에 들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하거든요. 작가에게 마침표는 '도돌임표' 같은 거예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원점으로 돌아가란 뜻인거죠. 처음부터 다시 글을 찬찬히 읽어보고 물 흐르듯 읽히지 않는 부분은 없는지 살펴봅니다. 첫 키스를 하듯 완전히 새로운 감각과 시선에서요.


글을 쓰는 내내 글 안에 매몰될 수밖에 없지만 최대한 처음 보는 글처럼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이건 마치 방금 전까지 지지고 볶고 싸운 사람에게 첫 데이트를 하던 핑크빛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거예요. 높은 레벨의 미션인 거죠. 다행인 것은, 세상의 모든 일 중에 연습으로 나아지지 않는 일은 없다는 겁니다. 이러한 훈련을 계속하다보니 가끔은 정말로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내 글을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어요. 내가 이렇게 썼단 말이야? 하고 놀라곤 하죠.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 헨리는 아침마다 혼란스러워하는 루시를 위해 새로운 방법을 찾아냅니다. 그녀가 왜 기억을 잃었는지, 그리고 기억을 잃은 동안의 히스토리를 정리한 영상을 만들어요. 그녀가 아침마다 낯선 남자를 보고 놀라지 않게, 백 마디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압축해 보여줍니다. 헨리의 정성에 힘입었는지 루시는 결국 기억을 되찾고 두 사람은 완벽한 사랑을 이뤄냅니다. 자신이 기억을 잃은 동안 헨리가 얼마나 애써주었는지를 알게 되었으니까요.


'조금만 더'를 외치며 애써 결승전까지 달려 왔는데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일은 때로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돌아갔다온 척 시치미를 떼고 싶을 때도 있어요. 그러나 확실한 것은 돌아갔다오면 돌아갔다올수록 글은 더 단단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별 수 있나요.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출발점으로 돌아가야죠. 칠칠맞게 흘린 물건은 없는지 살펴보고, 못 보고 지나친 주변의 풍경도 관찰하며 다시 결승전을 향해 달려올 거예요. 첫 키스만 50번째처럼, 모든 문장을 처음 만난 작가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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