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에 붙잡히기 ]
작가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순간에 붙잡히기]
누구나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반짝이는 순간들이 있다. 마음 속에 남은 기억과 추억 같은 것들. 모두 내가 붙잡은 순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순간은 아니다.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찡하고 마음을 울리고 마는 그런 순간이 있다. 순간이 나를 붙잡은 순간. - 고수리,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중에서
유독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좋은 순간이 있습니다. 비가 오고 딱히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떠오르는 그날의 한 순간. 그 순간은 되새김질하듯 자꾸 떠오르고 또 떠올라 기억의 탑에서 월등히 높은 위치를 차지합니다. 파스텔을 칠한듯 부드럽고 알록달록한 빛깔을 띄고.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집과 학교의 거리는 짧은 내 다리 보폭으로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하교하는데 그날은 유독 집으로 향하는 걸음이 무거웠어요. 몸이 편찮으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시던 우리집 색깔은 어린 나의 시선에서 회색빛이었거든요. 나는 최대한 천천히 걸으며 집에 도착하는 시간을 늦추었어요. 한 발 한 발 무거운 걸음에 더 무거운 마음을 실어서.
그러나 우리집은 너무 가까웠어요. 터덜터덜 현관문을 열고 운동화를 벗으려던 그 순간,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을 봤습니다. 거실 저 끝에 엄마가 의자에 걸터앉아 팔을 활짝 벌리고 나를 맞이하는 거예요. 그것도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담고. 그때, 거실 안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던 노란색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예상치 못했던 환한 미소를 본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얼어붙었던 것 같아요. 아마도 순간에 붙잡혔던 순간이었겠지요.
고수리 작가님의 글처럼 우리는 순간을 붙잡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에 붙잡히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소중한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면 붙잡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붙잡혀줘야 하는 걸지도 몰라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영롱하게 빛을 내는 순간들이 모여 내 감정의 깊이를 더 깊게, 더 진하게 만들어줄 테니까요.
나는 또 어떤 순간에 붙잡힐까요? 알 수 없지만 그 순간이 자주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