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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Aug 09. 2019

우리에게는 수영장이 필요해

 오로지 의지만이 출렁이는 푸른빛 그곳으로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의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년째 백수 생활을 하며 우울증을 앓고 있는 ‘베르트랑’. 딸과 함께 수영장에 갔다가 우연히 남자 수중 발레단을 모집하는 글을 발견한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찾아간 그곳에는 베르트랑 못지않게 답답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중년 남성들이 모여있다. 이를 테면 파산 직전이거나, 재능에도 없는 로커의 꿈을 꾸거나, 컴퓨터에 대체되어 일자리를 잃을 위험에 처해있거나.


그런 그들에게 수영장은 해방의 장소다. 비록 주변 사람들은 '게이'라며 손가락질하지만 목표는 무려 금메달. 사실 이 목표는 그들이 아니라 감독의 목표였다. 이 남자들에게 수중 발레는 그저 즐기려고 하는 것일 뿐이지만 감독은 시작을 했으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며 축처진 엉덩이들을 내려친다. 그런데 이 남자들, 왜 하필 수영장으로 간 것일까?


한 번은 워터파크에서 나보다 10cm도 더 키가 큰 친구의 손을 잡고 파도를 맞으러 들어간 적이 있다. 물이 배꼽 위 정도에 닿는 깊이에서 가벼운 파도를 즐기려고 했는데, 문제는 친구의 배꼽과 내 배꼽의 높이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내가 계속 "발이 안 닿아!"라고 소리쳤지만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고, 나는 결국 심하게 물을 먹고 말았다. 온몸이 물 안에 갇힌 단 몇 초 사이에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맛보았다. 그것이 나에겐 죽음의 공포와도 같았으나 영화 속 남자들에게는 탈출구였는지도. 물 안에서만큼은 자신을 비하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물 밖과 달리 더 잘난 사람, 더 못난 사람 없이 똑같이 허우적거리는 다리들만 보일 뿐이니까.


이 영화는 '동그라미는 네모 틀 안에 절대 들어갈 수 없다'는 말로 시작되어, '동그라미도 네모 틀 안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말로 끝이 난다. 금메달이라는 목표가 생긴 후로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연습 또 연습을 한다. 즐기려고 하는 것이니 조금 늦어도 된다던 ‘티에리’는 대회장에서 극심한 긴장으로 구역질을 하는 동료에게 정신을 차리라며 뺨을 때린다. 동그라미도 네모 틀 안에 들어가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생겼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하지만 어느 매체에서도 그들의 뉴스를 다루지 않는다. 누군가에겐 별 관심없는 따분한 이야기라할지라도 그들에게만큼은 인생의 전부를 건 도전이었고, 승패를 떠나 의지의 대가로 목표를 이루었다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


때때로, 우리에게도 수영장이 필요하다. 머릿속이 뜨거운 날엔 목표를 혼란시키는 번잡한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잡다한 오만가지의 것들이 보이지 않는 물 속으로 몸을 던지고 싶다. 오로지 의지만이 출렁이는 푸른빛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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