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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Oct 23. 2019

"너도?"라는 말에 불현듯 힘이 생겼다

멀리서 관망하거나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출근길에 우연히 옆에 서 있던 여자분의 휴대폰을 봤다. 보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눈길이 간 건 검색창에 적힌 병명 때문이었다. 나도 언젠가 그 병명과 비슷한 병명을 검색해본 적이 있었다. 다행히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당시엔 내 몸에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닌가 하며 정보란 정보는 모조리 찾아봤다. 화면을 터치하는 여자분의 손길은 매우 빨라서, 정보를 찾아보기 위함이 아니라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한 동작처럼 보였다.


나를 제외한 지하철 안의 모든 사람들은 별 일 없어 보였다. 다들 아무 걱정 없이 잘만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만 하루하루가 유난일까 싶었다. 좁은 지하철 안에서 눈 둘 곳이 없어 책을 펼친 채 다른 생각에 빠진 적도 있었다. 책을 들고는 있지만 도무지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않았다.


얼마 전 친구가 자신의 힘든 상황을 진지하게 털어놓았다. 장난처럼 투정을 잘 부리는 친구긴 하지만 그 정도로 무거운 속마음을 털어놓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친구는, 그 문제에 대해 나 말고는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어릴 때처럼 엄마에게 투정을 부릴 수도 없거니와 나이를 먹을수록 무거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해본 문제는 아니었기에 딱히 해줄 수 있는 위로가 없었고, 안아줄 수 있을 만큼 힘껏 안아주고도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도 없을 만큼 친구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그 후로 친구는 여전히 힘들어 보이면서도 더 이상 나에게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유독 감정이 한도 끝도 없이 쳐진다. 매일 똑같은 길을,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별다른 이유나 사건 없이도 아득한 짠맛이 느껴진다. 흔들리는 시간을 붙잡아보려 멀리 사는 친구에게 연락해보니 친구에게는 좋은 소식이 있었다.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솔직히 그 메시지에는 영혼이 담겨있지 않았다.


다음날, 어제 끊겼던 메시지를 이어가다가 사실은 내가 어제 버스 안에서 좀 감정이 쳐져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친구는 "너도?"라며 요즘 본인도 좀 많이 힘들었다고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던 너도 사실은 많이 힘들었구나, 하며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를 보냈다.


사랑으로 만난다는 것은
방관자적 삶의 자세로
그 사람을 멀리서 관망하거나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그 사람의 삶을 살아보는 겁니다.
- 유영만,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 중

 

사랑에서뿐이겠는가. 좋아하는 내 사람들과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고, 연락의 횟수도 줄어들면서 우리 사이에는 점점 '관망'과 '관조'가 늘어갔다. 나는 이렇게나 힘든데 너는 잘 지내는구나, 하며 너의 좋은 소식을 진심을 다해 축하해주지 못한 내가 미워졌다. 너도 힘들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로 내가 더 미워졌다. 상대방의 삶과 감정을 완전히 똑같이 느낄 수는 없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 자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너도?"라는 친구의 말에 불현듯 힘이 생긴 것처럼.


어쩌다 휴대폰을 훔쳐본 건 죄송하지만,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지만, 그 여자분께 '당신도?'라는 말을 건네고 싶었다. 괜찮을 거라고, 결국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나도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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