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수진 Nov 17. 2019

찬바람이 지나가면 카이로스가 찾아올까

시간은 둘로 나뉜다. 또한 돌아오지 않는다.

찬바람은 신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나에게 고통이다. 피부가 오돌토돌 올라오는 찬바람 알레르기가 있어 찬바람이 부는 가을부터 경계 태세에 들어간다. 퉁퉁 부어오른 얼굴을 목도리로 친친 감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가을과 겨울 사이. 찬바람은 내 피부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알레르기를 퍼뜨린다. 흔히 '가을 탄다'며 우스갯말처럼 했던 말이 더 이상 우습지가 않다. 이렇게 2019년도 끝이 보이고 있다.


또다시 찾아오고 지나쳐갈 연말일 뿐이지만, 결승선에 와 닿은 것처럼 뒤를 돌아보게 된다. 올해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연초에 계획했던 일들은 계획한 대로 이루어졌는지. 아니, 개뿔 계획대로 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 많은 시간을 버티듯 보냈고,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감힘을 쓰던 손에는 점점 힘이 풀리고 있었다. 그만 철봉에서 손을 놓으려는 순간, 아래에서 나를 받쳐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체육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마지막 10초!"


그 말에, 신기하게도 내 손가락 끝에 없던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후 며칠째 근육통을 앓고 지내면서도 찰나의 순간 철봉을 놓지 않은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마지막 10초. 평소라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갈 짧은 시간이지만 이미 힘이 닳고 닳은 상태에서 철봉에 매달려 있는 사람에겐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다. 놓아버리기엔 버텨온 노력이 아쉽고, 더 붙잡고 있자니 고통스러운 10초 동안 나는 무슨 생각으로 버텨냈을까.


저마다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한 가지 단어,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내 삶을 이끌어가는 견인차 같은 단어가 있을 것입니다. 그 마지막 어휘가 지금 여기서의 삶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소중하고 숭고한 삶, 자기를 넘어 타자와 공동체로 연결되는 삶을 꿈꾸게 만듭니다. - 유영만,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중

 

시간. 나는 그 순간 시간을 생각했다. 위 책에 따르면, 시간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와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인 '카이로스'로 구분된다고 한다. 나에게 그 마지막 10초는 카이로스에 해당된 시간이었고, 평생의 시간 중 크로노스보다는 카이로스가 많은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다. 카이로스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크로노스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어렵지만, 카이로스를 맛본 후에는 크로노스의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견디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나는 요즘, 크로노스를 견디기가 힘들다. 카이로스를 간절히 열망하지만 번번이 철봉에 매달린 손을 놓치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은 절대로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간단한 법칙이 연말마다 찬바람 알레르기처럼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올해 겨울은 지난겨울보다 더 춥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 찬바람을 어떻게 버텨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찬바람을 잘 버텨내면 다시 카이로스가 찾아올까. 누군가 아래에서 "조금만 더"를 외치고 있는 듯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안전한 속초 바다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