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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May 24. 2018

늘 앉던 자리에 앉는 예측 가능한 사람

예측 가능한 것으로부터 오는 행복

한번 무언가에 빠지면 그것 하나만 질리도록 무한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좋은 음악을 발견하면 질릴 때까지 그 음악만 반복해서 듣는 것이다. 집에서부터 강남까지 왕복 약 3시간이 걸리는 출퇴근길에 그 노래 한곡만 일주일 내내도 듣는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한곡만 반복해서 재생해놓으면 다음에 어떤 곡이 재생될지 모르는 불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어서 좋다. 공허함은 채워주되 생각의 흐름에 방해물을 놓지 않는 것이다.


버스에서도 늘 왼쪽에서 네 번째 자리에 앉는다. 집이 버스 종점이라 버스 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넓은데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늘 왼쪽에서 네 번째 자리를 고집한다. 그러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유독 내 얼굴 왼쪽 부분에 기미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제 버스에 앉을 때 오른쪽에 앉아야겠다, 생각해놓고도 잊어버리고 또 왼쪽에 앉았다. 습관이라면 습관, 고집이라면 고집이다.


늘 가는 카페에서 내가 고집하는 한 자리


늘 듣던 그 노래만, 늘 앉던 그 자리만, 늘 먹던 그 음식만 고집하는 나는 어쩌면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엔 내가 들어보지 않은 노래가 훨씬 더 많고, 다른 자리에서 보이는 새로운 풍경을 즐길 수도 있고, 내가 맛보지 못한 세상의 온갖 음식들을 먹어볼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음에도 늘 하나만 고집하려고 하는 거니까. 때론 그런 내가 스스로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너무 안일한 상태에만 머물려고 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


이 고집을 조금씩 고쳐보려고 했다. 시간은 소중하고, 젊음은 더더욱 소중하기에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더 색다르게, 더 풍요롭게, 더 다양한 색깔로 꾸며야 할 것만 같았다. 그 노력은 현재도 진행중이지만 이런 내 고집을 너무 미워하지는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늘 앉던 자리가 주는 익숙함 속에서 잠시나마 시끄러운 잡생각은 잊은 채 글을 쓸 수 있고, 늘 듣던 노래가 주는 편안함 속에서 출퇴근길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으니 이 고집도 아예 쓸데없는 고집은 아니지 않겠는가.


작년, 한 페스티벌에서 권해봄PD의 강연을 들었다. 강연 내용 중 이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자신은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는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지금까지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오면서 서로를 예측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왔던 것 같다. 나는 상대방이 A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A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땐 조심스럽게 꺼내고, 상대방은 내가 맥주를 얼마나 마시면 취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 때가 되면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 주는 것이다. 예측할 수 있기에 가능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예의다.  

  

너무 익숙하고 편안해서 잘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예측 가능한 것에서부터 오는 행복은 쌓아온 시간 속에, 또 서로가 나눈 모든 대화와 표정과 몸짓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 행복을 발견할지 안할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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