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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May 26. 2018

머리가 베개에 닿자마자 잘 순 없을까

불면증은 터지기 일보 직전의 여행 가방 같은 것

'잠이 안 온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지는 타입이라 밤을 꼴딱 새본 적은 평생 단 한 번도 없었다. 수능을 앞둔 고3때도 잠 하나는 기가막히게 잘 잤다. 친구들과 여행을 가서도, 늘 가장 먼저 잠이 들었다. 여기까지 놀러와서 그렇게 빨리 자냐는 볼멘소리를 들으면서도 잘도 잤다.


그랬던 내가 요즘 잠이 잘 안 온다. 자려고 누우면 기본 한 두시간은 뒤척인다. 피곤하면 그나마 잠이 잘 올까 싶은데, 유독 피곤하게 움직인 날엔 더 잠이 안 온다. 불을 끄고 휴대폰 속의 세상 이야기를 이야기를 들여다보다가 '안돼, 이제 자야 돼'하며 억지로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해본다. 그리고 10초도 안돼 다시 휴대폰을 집어든다. 11시에 자려고 누웠는데 1시가 넘어서까지 그 짓을 반복한다. 안되겠다. 조용한 노래 한 곡을 반복 재생으로 틀어놓는다. 똑같은 노래를 몇 차례 듣다가 결국 잠에 든다.

  

계속해서 잠이 잘 안 오기 시작한 건 작년 말쯤부터였던 것 같다. 자려고 누우면 후회되는 일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땐 그런 말을 하지 말걸', '그땐 좀 더 용기를 내볼걸', 하는 아무런 의미없는 생각들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창문을 타고 넘어와 내 침대를 공격해오는 것 같다. 후회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짓이라는 걸  잘 아는데, 굳이 말 안해줘도 잘 아는데, 나는 그렇게 지나간 일들에 대한 후회와 씨름을 하느라 오래도록 잠을 설쳤다.


지나간 것들에 대한 후회 때문만은 아니다. 후회만큼이나 멍청한 또 다른 짓이 하나 더 있다. 미래에 대한 걱정도 설상가상으로 공격해온다. 선생님이 장래희망 좀 생각해보라고 하셨을 때는 단 한번도 미래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었으면서. 내일 그 일은 어쩌지, 모레 그 일은 어쩌지, 1년 후엔 어쩌지, 평생 어떻게 살지, 꼬리에 꼬리를 문 걱정들이 내 베개 아래까지 침범해온다.


내 불면증은 어쩌면 터지기 일보직전의 여행 가방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1박 2일로 여행을 가면 친구들은 숄더백에 꼭 챙겨야 할 속옷과 화장품 몇 가지만 가볍게 챙기는 반면, 나는 내 몸집만한 여행 가방에 오만 가지 잡동사니를 꾹꾹 눌러담아 가지고 다니느라 늘 고생이었다. 즐겁자고 온 여행이 여행 가방 때문에 즐겁지가 않았다. 불면증은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찬 내 여행 가방처럼 그 무게를 견디기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온갖 걱정들을 가지고 잠을 자려고 하니 잠에 드는 그 시간의 발걸음이 가벼울 리가 없다.


이제는 무거운 여행 가방이 내 여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걱정일랑 제쳐두고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잠에 들고 싶다. 누가 보쌈을 해가도 모를 정도로 오로지 지금의 잠에만 충실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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