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수진 Dec 31. 2019

온전히 혼자도, 함께도 아닌 이곳에서

한 살 더 먹으러 제주에 왔습니다

제주행 비행기를 끊고 '사서 고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매일 출퇴근길에 세 시간을 쏟아부으며 하루하루 달라지는 체력을 느끼고, 그 어느 때보다 정신적으로 많은 것을 소모했던 한 해였다. 이틀 연속 연차를 낸 김에 전기장판이나 뜨끈하게 켜놓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밀린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좋겠다 싶었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 캐리어를 끌고 다닐 생각만 해도 벌써 지치는 듯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내 손으로 비행기를 끊어놓고 무엇 때문에 혼자 괴로워하는 건지.


이제는 어렴풋이 안다. 나조차도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나의 행동은 알고 보면 무언가의 '끌림' 때문이라는 것을. 민감한 기질을 타고난 나는 스스로 '촉'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미세한 변화도 잘 감지하는 탓에 피곤할 때가 참 많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상대방의 표정에 마음이 쓰여 혼자 끙끙 앓고 있으면 사람들은 "너무 신경 쓰지 마"라고 했다. 그렇게 묻어놓고 시간이 지나면 미세했던 표정 변화는 눈덩이처럼 큰 문제로 찾아왔다. 거 봐, 내가 뭐랬어,라고 말하기엔 이미 늦어버린 후.


내 촉을 믿기로 했다. 당장은 귀찮아 죽을 것 같아도 제주행 비행기를 끊은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온몸이 부서질 듯 피곤하고, 혼자 식당에 들어가 밥 먹으면 심심할 것 같고, 괜히 돈만 낭비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들을 뒤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행 비행기에 올라타는 것은 내가 나에게 보내는 신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늘 가고 싶었던 게스트하우스의 1인 룸 예약이 다 차서, 다른 사람과 함께 쓰는 룸으로 예약했다. 방은 혼자 쓰되 옆방을 쓰시는 분들과 거실과 화장실을 셰어 하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과 한 집에서 자본 적이 없어 걱정이 됐다. 불편하면 어쩌지. 내가 먼저 입실을 하고 얼마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식은땀이 났다. 우리는 어색한 첫인사를 나누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언니', '동생'이라고 부르며 수다의 꽃을 피웠다. 피곤함도 잊고 밤이 깊도록.


다음 날은 제주에 사는 친구를 만났다. 비교적 일찍 결혼한 친구는, 결혼을 하고 제주에 터를 잡았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제주에 자주 올 수 있었던 건 팔 할이 친구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여 친구와 시간이 맞지 않아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친구가 제주에 산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큰 힘이 됐으니까.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게 해 준 건 '친구'라는 익숙한 존재였다.


친구와 일 년 동안의 밀린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떠들다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 혼자가 되니 기분이 이상했다. 텔레비전이나 음악을 켜지 않으면, 파도와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옆방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새로 오신 옆방 분들은 살가운 미소로 귤 다섯 개를 건네주셨다.


셋째 날엔 온전히 혼자가 되었다. 날씨운이 좋지 않아 이번에도 비바람에, 우박까지 다사다난하지만 그래도 모자를 푹 눌러쓰고 길을 나섰다. 시끌시끌한 관광지를 피해 골목길을 걷다 커다란 개를 맞닥뜨리고 너무 깜짝 놀라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깜짝 놀랐잖아!"라고 요란 피우며 말할 곳이 없어도 괜찮았다. 그저 묵묵히 가던 길을 걸었다.


찬바람을 피해 바다가 훤히 보이는 조용한 카페에 들어가 내년의 버킷리스트를 적었다. 내년이라고 해봤자 바로 내일. 앞으로 내가 추구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썼다.   전만 해도 내가 원하는 것을 쓰는 것이 익숙치 않았지만 이것도 습관인지 이제는 크나큰 꿈을 뻔뻔하게 잘도 쓴다. 혼자서 해내야  것들과 누군가와 함께 이뤄내야  것들이 적절히 섞여 있다. 마치 이번 제주 여행처럼, 온전히 혼자도 온전히 함께도 아닌  적절한 균형을 찾아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전생에 고향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이 끌리는 제주, 안녕. 2019년 안녕.


매거진의 이전글 요즘 나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