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수진 Jan 30. 2020

각자의 충분

이제 백 번 천 번 밥통을 외쳐도 울지 않는다

내 생애 첫 욕은 '밥통'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 이미 친구들 사이에서 '존X', '씨X' 정도의 욕이 무분별하게 나오고 있었지만, 나는 평생 죽어도 욕을 쓰지 말자고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한 남자 애가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다. 묶은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고, 하루 종일 혀를 낼름거리며 약을 올렸다. '그만해!', '하지 마!' 정도로는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충분히 전달이 안 될 것 같았다.


" 밥통아!"


참다 참다 내뱉은 말이 밥통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귀여운 수준이지만, 그 당시에는 '내 입에서 어떻게 이런 심한 말이 나왔지?' 하며 당황했다. 오히려 밥통 소리를 들은 친구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평생 욕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키지 못한 나는 나 자신에게 몹시 실망해 엉엉 울었다. 나를 놀린 그 남자애는 자기가 놀려서 우는 줄 알고 그제야 미안해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욕을 내뱉을 때의 시원함을 한 번 느껴본 이상 두 번, 세 번은 물 흐르듯 쉬웠다. 욕의 강도는 나날이 높아졌고, 모든 말에 '존X'를 안 붙이면 싱겁게 느껴지는 단계에 이르렀다.


"존X 짜증나"

"존X 짱이다"


꼭 존X를 붙여야 진심 같았다. 내가 느끼는 감정의 정도를 가장 높은 레벨로 표현해야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쓰면 쓸수록 닳는 법. 존X를 아무리 붙여도, 억양을 더 거칠게 표현해도 충분하지가 않았다. 존X는 더 이상 존X가 아닌 게 됐고, 철없이 쓰던 그 말은 아무 의미 없는 못된 말로 수명을 다했다. 그 말의 수명은 더 빨리 다했어야 했다.


나의 생각과 감정을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아 답답한 마음이 들면 가장 먼저 내 전달력부터 탓하곤 했다. 물론 전달력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을 간과했던 것 같다. 밥통이라는 말에도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내뱉어도 분을 삭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온몸을 쥐어 짜내어 충분히 전달해도 상대방이 충분히 느끼지 못한다면,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의 충분’이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 밥통아!”를 외치고 주저앉아 울던 소녀는 이제 백 번 천 번 밥통을 외쳐도 울지 않는다. 요즘은 오히려 그게 조금 더 슬프게 느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온전히 혼자도, 함께도 아닌 이곳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