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도 죄송하지 않은 글을 쓴다

손은 거들 뿐, 글은 마음이 다 쓴다

by 유수진

심리 상담사 분이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하얀 종이와 20개색 크레파스. 적당히 가까운 위치에 있던 갈색 크레파스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말도 아니고 글도 아닌, 그림으로 내 감정을 표현하자니 막막함에 얼어붙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앞에 앉아계신 상담사 분께 죄송해서 뭐라도 긋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그은 이 곡선들이 정말 내 감정일까. 아니, 잘 모르겠다. 나는 글보다 더 내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스케치북을 앞에 두었을 때처럼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때때로 내 마음이 읊는 소리를 타이핑 속도가 따라잡지 못해 다 받아적지 못할 때도 있다. 나에겐 조금 아쉬울지 몰라도 누구에게도 죄송하지 않은 글을 쓴다. 손은 거들 뿐, 글은 마음이 다 쓴다.


문토 글쓰기 모임 <글 까짓거> 3회차. 멤버들의 글의 무게가 매회 무거워지고 있다. 마치 글을 쓰는 도구가 손에서 마음으로 조금씩 옮겨가는 듯하다. 마음으로 쓴 글들 앞에서 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한다. 주제는 간단했는데 쓰인 글은 간단치가 않아서. 사람들은 한 자리에 모여 진심을 쓰고 있었다.


진심을 글로 쓰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를 정말 아껴주던 그 친구는, 편지지를 꽉 채우고도 빈틈이 아까웠는지 작은 빈틈마저 그림으로 채워 내게 편지를 보냈다. 참으로 못 그린 그림을 보고 웃음이 났다. 그 아이는 글, 그림, 혹은 뭘로든 자신의 마음을 가득 표현할 줄 알았다. 나는 다 큰 어른이 되고나서야 그 아이가 부러워졌다.


다음 시간에는 미워했던,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에 대해 쓴다. 어려운 주제임을 알기에, 다음 시간의 주제를 공지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픈 상처를 글로 꺼내는 일은 가장 연약한 살을 송곳니로 물어뜯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써야만 했다. 쓰는 것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 지독한 과정을 다음 시간에 멤버들과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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