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두 번째 엄마가 있다면, 막내 이모였다. 엄마를 포함해 네 자매가 판박이처럼 닮으셨지만, 유독 막내 이모는 우리 엄마와 참 많이 닮으셨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서 상복을 입고 나란히 앉아 계시던 엄마와 이모의 뒷모습은 누가 우리 엄마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두 딸을 낳으신 것도 똑 닮았다.
엄마와 나이 터울이 꽤 있어서인지 이모는 내게 늘 '젊은 엄마' 같았다. 내가 아주 어릴 적, 삼성에서 일하시던 이모는 언니와 나를 위해 게임기를 보내주셨는데, 이모가 없었다면 그런 최신식 물건은 가져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 가장 핫한 놀이공원이었던 '자연농원' 입장권도 보내주신 덕분에, 우리 가족은 그날 찍은 기념 사진을 머그컵에 프린트해 아직도 현관문 앞에 놓아두고 있다.
자주 보진 못해도 일 년에 두 번, 명절 때마다 이모를 만났다. 이모는 어린 내가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던 단위의 큰 용돈을 주셨고, 용돈 생활을 한 적 없던 내게 그것은 엄청난 기쁨이었다. 받은 용돈은 반년 동안 잘 모아 두고 있다가 꼭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큰 마음을 먹고 꺼내 썼다. 이모는 유독 나를 잘 챙겨주셨다. 친척은 많아도 친한 친척은 별로 없었는데, 이모의 두 딸인 나의 이종사촌들에겐 잘해주고 싶었다. 내가 받은 만큼 좋은 친척 언니가 되어주고 싶었다.
엄마에게 막내 이모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였다. 이모보다 먼저 두 딸을 키워내 지 밥벌이까지 하며 살게 만든 우리 엄마는, 이모와 종종 통화를 하며 "수진이도 그땐 다 그랬어"하며 양육의 고민을 나눴다. 이모의 두 딸도 어느덧 다 컸으니 조금 더 있으면 이제 두 분 모두 편안하게 딸들이 주는 용돈으로 여행을 다니실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사실 우리 엄마를 위한 생각이었다. 이제는 엄마가 가장 친한 친구의 손을 잡고 여행이나 다니시면서 제대로 놀아보시길 바랐다. 나와도 종종 여행을 갔지만 까칠하고 못난 딸은 엄마의 완벽한 여행 메이트가 되기는 아직 멀었고, 대신 회사에서 꽤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 여행비 정도는 두둑이 챙겨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이모와 함께 국내고 해외고 마음껏 여행을 다니실 수 있게 해드리려고 했다.
이모가 아프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장난기 많은 소녀처럼 쩌렁쩌렁 밝게 웃으시던 이모에게 그런 무서운 병이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다. 갑작스러웠던 만큼 스쳐 지나갈 일이겠거니 막연하게 생각했다. 백화점에서 이모가 쓰실 모자를 사면서도, 모자를 쓰실 일이 곧 없어질 거라고 애써 믿었다. 엄마를 통해 전해 듣던 이모의 건강 상태는 '거의 다 나았어'에서 순식간에 침묵이 되어버렸다. 엄마가 병원을 오가는 횟수가 더 잦아졌지만 엄마는 언니와 내가 병원에 찾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엄마의 의견을 존중해드리고 싶었지만 언니와 나는 병원에 찾아가 이모를 뵙기로 했다. 이모가 계신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왜 엄마가 병원에 찾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셨는지 알 수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펑펑 운 건 거의 처음이었고, 그날이 나의 두 번째 엄마를 만난 마지막 날이었다.
이모를 보내드린 후, 나는 생각보다 오랫동안 상실감을 느꼈다. 엄마의 세상이 무너지는 일은 나의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기도 했고, 나에게도 자매가 있기에 더욱 아렸다. 일 년에 두 번, 명절 때마다 만나는 친척을 넘어 이모는 나에게 두 번째 엄마였고, 언젠가 부모님께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이모를 찾아가면 되겠거니 생각했다. 우리 엄마를 똑 닮은 두 번째 엄마의 존재가 얼마나 든든하고 감사한 존재인지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다.
그 후로 몇 번의 명절이 지났다. 그 몇 번의 명절이 찾아올 때마다 엄마는 아팠을 것이다. '이모'라는 호칭보다는 나에겐 두 번째 '엄마'에 더 가까운, 이모를 기억하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