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드라마 <아일랜드> 재방송을 보려고 학교 끝나자마자 집으로 내달렸던 기억이 있다. 학원에 가느라 본방송을 못 챙겨봤던 모양이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내가 이 드라마에 푹 빠진 이유는 현빈이라는 잘 생긴 신인 배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캐릭터들의 특이한 말투 때문이었다. 이나영 씨는 물론 김민준, 김민정 배우는 전에 없던 신기한 캐릭터였다. 툭툭 뱉는 대사들이 평소에 우리가 쓰는 말들과는 달랐다. 그래서 미치게 매력적이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연말 K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작가상을 받으러 무대 위에 올라가는 나를 상상한 것이. 어떤 연예인이 좋아서 장래희망을 연예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정말 '그냥' 해보는 꿈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내 이름은 김삼순>이나 <파스타>처럼 전에 없던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드라마가 방영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밤 11시(드라마가 끝나는 시간)가 될까 봐 조마조마해하며 다음 주 수요일까지 또 어떻게 기다리나 망연자실해하며 ‘그냥' 해본 꿈에 아주 조금씩 무게가 더해져 갔다.
드라마를 쓰려면 인생 경험이 필요하다거나 전업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핑계로, 잊고 살던 그 꿈을 다시 떠올린 건 <라이브>를 보면서였다. 평소 노희경 작가님의 드라마가 내 스타일은 아니었고, 라이브가 재미있다는 지인들의 이야기에도 굳이 챙겨보진 않았다. 그러다 3년 여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가 되었던 작년, 드라마나 정주행 해볼까 싶어 그것을 보다가 오랜만에 시원하게 눈물 꼭지를 틀었다. 사람 냄새가 난다는 말이 어떤 말인지 이 드라마를 보고 깨달았다. 이 세상 사람 모두 그마다의 이유를 갖고 그렇게 만들어져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며 공감하는 것, 그게 사람 냄새였다.
먼지 쌓인 라이브 대본집을 펼쳤다. 대본집과 대조하며 이미 정주행 한 드라마를 다시 1화부터 보기 시작했다. 영상만 볼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배우들이 정해진 대사에 매우 충실하다는 것에 놀랐고, 지문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감정 표현을 하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장미 (핸드폰 오면, 받고, 차분한) 네, 네, (잠시 답답하지만, 깔끔하게) 네, 곧 갈게요. (하고, 식탁으로 볶음밥을 프라이팬째 가져와, 앉아 먹는)
극 중 장미를 연기한 배종옥 씨가 부모님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의 상황이다. 여기서 '잠시 답답하지만, 깔끔하게'를 모두 표현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 놀랐다. 작가와 배우의 합이 잘 맞으면 대사는 그야말로 생명을 가진다. TV 속 캐릭터가 아닌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존재하는 사람이 된다.
봤던 드라마를 또 보면서도, 울었던 장면에서 또다시 눈물이 터진다. 이해할 수 없던 캐릭터들의 행동이 알고 보면 다 그만한 이유를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눈물이 난다. '이혼'을 아무렇지 않게 담담하게 말하는 장미에게는 남편이 있다. 부모님이 위독하다는 연락에 "자기야, 일단 (병원) 가보고 일 있음 전화하면 안 될까?"라고 말하는 양촌이다. 그리고 양촌에게는 경찰로서의 투철한 사명감이 있다. 자살을 하려 바다로 뛰어드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제 한 몸을 일체 고민없이 차가운 바닷물에 던지는.
알고 보면 다 그마다의 이유를 갖고 살아감을 드라마를 통해 배운다. 그런 사람 냄새나는 드라마를 언젠가는 내 손으로도 쓸 수 있기를, 드라마를 보며 드라마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