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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Apr 03. 2020

드라마에선 저마다의 이유를 갖고 산다

2004년 드라마 <아일랜드> 재방송을 보려고 학교 끝나자마자 집으로 내달렸던 기억이 있다. 학원에 가느라 본방송을  챙겨봤던 모양이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내가  드라마에  빠진 이유는 현빈이라는  생긴 신인 배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캐릭터들의 특이한 말투 때문이었다. 이나영 씨는 물론 김민준, 김민정 배우는 전에 없던 신기한 캐릭터였다. 툭툭 뱉는 대사들이 평소에 우리가 쓰는 말들과는 달랐다. 그래서 미치게 매력적이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연말 K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작가상을 받으러 무대 위에 올라가는 나를 상상한 것이. 어떤 연예인이 좋아서 장래희망을 연예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정말 '그냥' 해보는 꿈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내 이름은 김삼순>이나 <파스타>처럼 전에 없던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드라마가 방영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밤 11시(드라마가 끝나는 시간)가 될까 봐 조마조마해하며 다음 주 수요일까지 또 어떻게 기다리나 망연자실해하며 ‘그냥' 해본 꿈에 아주 조금씩 무게가 더해져 갔다.


드라마를 쓰려면 인생 경험이 필요하다거나 전업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핑계로, 잊고 살던 그 꿈을 다시 떠올린 건 <라이브>를 보면서였다. 평소 노희경 작가님의 드라마가 내 스타일은 아니었고, 라이브가 재미있다는 지인들의 이야기에도 굳이 챙겨보진 않았다. 그러다 3년 여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가 되었던 작년, 드라마나 정주행 해볼까 싶어 그것을 보다가 오랜만에 시원하게 눈물 꼭지를 틀었다. 사람 냄새가 난다는 말이 어떤 말인지 이 드라마를 보고 깨달았다. 이 세상 사람 모두 그마다의 이유를 갖고 그렇게 만들어져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며 공감하는 것, 그게 사람 냄새였다.  


먼지 쌓인 라이브 대본집을 펼쳤다. 대본집과 대조하며 이미 정주행 한 드라마를  다시 1화부터 보기 시작했다. 영상만 볼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배우들이 정해진 대사에 매우 충실하다는 것에 놀랐고, 지문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감정 표현을 하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장미     (핸드폰 오면, 받고, 차분한) 네, 네, (잠시 답답하지만, 깔끔하게) 네, 곧 갈게요. (하고, 식탁으로 볶음밥을 프라이팬째 가져와, 앉아 먹는)  


극 중 장미를 연기한 배종옥 씨가 부모님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의 상황이다. 여기서 '잠시 답답하지만, 깔끔하게'를 모두 표현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 놀랐다. 작가와 배우의 합이 잘 맞으면 대사는 그야말로 생명을 가진다. TV 속 캐릭터가 아닌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존재하는 사람이 된다.


봤던 드라마를 또 보면서도, 울었던 장면에서 또다시 눈물이 터진다. 이해할 수 없던 캐릭터들의 행동이 알고 보면 다 그만한 이유를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눈물이 난다. '이혼'을 아무렇지 않게 담담하게 말하는 장미에게는 남편이 있다. 부모님이 위독하다는 연락에 "자기야, 일단 (병원) 가보고 일 있음 전화하면 안 될까?"라고 말하는 양촌이다. 그리고 양촌에게는 경찰로서의 투철한 사명감이 있다. 자살을 하려 바다로 뛰어드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제 한 몸을 일체 고민없이 차가운 바닷물에 던지는.


알고 보면 다 그마다의 이유를 갖고 살아감을 드라마를 통해 배운다. 그런 사람 냄새나는 드라마를 언젠가는 내 손으로도 쓸 수 있기를, 드라마를 보며 드라마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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