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당구 큐대 앞에서 무릎 꿇고 싶지 않았다. 그날은 사랑의 매가 허용되었던 내 학창 시절 중 가장 센 매를 맞은 날이었다. 교복 블라우스를 치마 밖으로 빼 입는 것이 금지되었던 시절, 유독 그것을 엄격히 통제하던 한 선생님이 있었다. 사춘기 시절의 우리는 블라우스를 빼 입고 다니다가 멀리서 그 선생님이 보이면 얼른 치마 속으로 구겨 넣곤 했는데, 하루는 그만 딱 걸리고 말았다.
그는 당구 큐대로 내 엉덩이를 내려쳤다. 매를 맞으면서 단 한 번도 엄살을 부린 적이 없었는데, 당구 큐대로 여린 살을 맞는 것은 정말이지 무척 아팠다. 그래도 이 꽉 물고 '악' 소리 내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아픈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매를 맞은 후 그가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엉덩이 한 번 매만지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와 엄마와 언니 앞에서 엉덩이를 깠다. 엉덩이부터 허벅지 뒤 전체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엄마와 언니는 신고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결정적 요인이다. 말이 아니라 내 고통을 공감하는 존재가 치유의 핵심이다. 자신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알면 사람은 지옥에서 빠져나올 힘을 얻는다. - 정혜신, <당신이 옳다> 중에서
싫어하는 사람 앞에선 강해 보이려고 애썼다.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 상처 받아도 상처 받지 않은 척. 가족들 앞에서나 시퍼렇게 멍든 허벅지를 내보였던 것처럼 나의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해줄 사람에게만 내 약한 모습을 내비쳤다. 돈을 빼앗긴 날도 그랬다. 체육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왔는데 가방에 넣어두었던 3만 원이 없어졌다. 아침에 엄마가 잘 챙겨두라고 했던 돈이었다. 누구의 소행인지 알고 있었다. 우리 반 아이들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입 밖으로 그 이름을 말했다간 일이 커질 터였다. 한 남자 애가 입꼬리를 삐죽 올리고 웃고 있었다.
화장실로 달려가 화장실 문을 세게 걷어찼다. 친구들이 다독였지만 분노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다음 수업 종이 울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교실로 와 자리에 앉았다. 수업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번호는 1004. 내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략 이런 문자였다. 많이 속상하겠다고. 내가 3만 원을 구해와 보겠다고. 그 순간, 모든 분노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찔끔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지난 5년, 세월호 유가족 같은 극한의 트라우마 피해자들이 목숨을 버리지 않고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이런 시민들의 거대한 무력감과 죄의식의 연대가 만들어낸 치유적 공기에 많은 부분 기대고 있었다고 느꼈다. - 정혜신, <당신이 옳다> 중에서
나는 그 1004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네가 1004지?'라고 묻지 않았다. 1004를 지켜주고 싶었다. 1004에게 기대고 싶었다. 내 옆에 1004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평생 트라우마가 될 뻔했던 그 사건은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누군가 나에게 기대고 싶다고, 나 정말 너무 힘들다고 고백한다면 한 마디 말보단 안아주고 싶다. 나를 무척이나 신뢰한다는 뜻일테니. 나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뜻일 테니. 뭐든 잘 해낼 수 있다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면 오히려 나를 티끌만큼도 믿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에겐 1004가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1004가 되어줄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