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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Jun 11. 2018

바다를 보면 속이 뻥 뚫릴 줄 알았지

효과는 딱 30분이었다

가슴이 답답할 때 생각나는 건 역시 바다였다. 집중해야 할 지점도 없고, 밀려간 만큼 또 밀려오는 파도를 시간 제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는 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사치이니까.


반복되는 일상만큼 생각도 틀에 박혀버린 요즘이다. 익숙해진 일상은 새로운 생각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았고, 생각이라는  하면 할수록 감정만 소모되었다. 그럴 바에야 피식 웃을  있는 스낵 영상이나 보며 생각을 죽이는 편이 나을  같았다. 생각이 많아도 문제, 생각이 없어도 문제,  복잡한 인간이여.


역시 생각의 동물인 건지, 생각을 멈추자 빈껍데기가 된 느낌이 들었다. 대단하고 거창한 생각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계획, 현재 상태와 감정에 대한 이해, 만들어봤으면 하는 변화들, 관계의 정리들이 필요했다. 양치질을 하고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귀찮다는 이유로 무기한 생각 파업을 선언해버린 것이다.


문득 바다에 가고 싶어졌다. 바다를 보면 왠지 속이 뻥 뚫리면서 생각다운 생각을 생각해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바다로 향했다. 결론적으로 바다를 본다고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바다를 보니 술만 술술술 잘도 들어가서 잔뜩 마시고 뻗었다. 그러다 새벽 네 시쯤, 숙취가 올라와 잠에서 깼다. 베란다로 기어나가니 새벽 바다가 저 멀리서 여전히 파도를 밀어보내고 있었다. 똑바로 앉아 있기도 힘들 만큼 속이 쓰렸지만 한 번이라도 더 파도를 맞고 싶어 잠시 버티고 서 있었다. 하나, 둘, 하나, 둘,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목 끝까지 찼던 숙취와 함께 무언가가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바다 한 번 본다고 속이 뻥 뚫리면 이 세상 소화제는 다 사라져야겠지만, 꽤 나쁘지 않은 자연치유법인 것 같다. 효과는 딱 30분이었지만.



이 글은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에 수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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