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운전을 시작하기 전, 방문 연수를 두 번 받았다. 운전 학원까지 찾아갈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는데 방문 연수는 강사 분이 직접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주시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연수를 알아보던 중, 남자 강사분께 운전을 배우다 몇몇 안 좋은 일이 발생했다는 이야길 들었다. 괜히 찝찝한 마음으로 배울 바에 여자 강사님을 선택하기로 했다.
내가 만난 여자 강사님은 운전을 하는 내내 나에게 집중하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어떻게 운전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취미로 운전을 배운다'는 내 모토를 강력히 비웃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결국 학원에 컴플레인 전화를 걸었고 그 이후부터는 강사님이 조심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교육의 질이 나아지진 않았다.
결국 다음 연수는 남자 강사님으로 선택했다. 종종 성희롱과 같은, 안 좋은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지만 연수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에게까지 그런 일이 벌어지리란 법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강사님이 우리 아파트 앞까지 찾아왔고, 우리는 좁은 차 안에서 처음 인사를 나눴다. 만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느꼈다. 좁은 차 안에서 낯선 남자와 함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얼마나 불편한지.
남자 강사의 첫 안내 사항은 "불가피하게 당신의 몸을 터치해도 불편해하지 말라"였다. 운전 연수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수강생의 몸을 터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해되는 말이었다. 운전은 그와 내 목숨이 달린 일이다. 내가 핸들을 제대로 조정하지 못하면 언제든 그가 내 손을 잡고 핸들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쯤은 인정할 수 있었다. 그는 얼마 전 갓 스무 살이 된 수강생에게 연수를 해주다가 신고가 들어왔다며, 본인도 장성한 아들이 있는 평범한 아버지인데, 몹시 억울하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루에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이 차 안에 앉아 있다 보면 별별 이야기를 다 나누게 된다. 처음엔 무슨 일을 하는지, 회사는 어디 쪽에 있는지와 같은 간단한 질문과 대답이 오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질문의 정도가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기 시작했다. 결혼은 했는지, 남자 친구는 있는지와 같은 이야기였다. 그때부터 나는 경계모드에 들어갔다. 그의 운전 교육은 구체적이고 체계적이었으나 좌석이나 핸들의 위치를 바꾸는 과정에서 애매한 터치가 생겼다. 그리고 그가 내 어깨에 터치를 하는 순간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나'
"저 지금 불편한데요. 사과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연수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가 나에게 어떻게 행동하는지 날을 세워 경계하고 지켜보며 연수를 끝까지 마쳤다.
모든 방문 연수가, 모든 남자 강사님이 그렇지는 않다. 나도 안다. 그래서 '역시나'라는 말이 무서운 거다. 편견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내가 만나 본 두 강사의 방문 연수는, 평생 내가 겪어볼 경험의 전부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경험을 한 내가 어떻게 지인에게 방문 연수를, 남자 강사님을 추천할 수 있겠는가. 내 사람마저 '역시나'를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 나와 내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편견은 그렇게 조금씩 고착화된다.
사실 나의 이러한 편견은 서른이 넘는 인생 동안 차곡차곡 쌓여온 편견이다. 단 하나의 사건으로 편견이 정립되었을 리 없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서 혼자 맞닥뜨린 바바리맨은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었고, 지하철 옆좌석에 앉은 아버지 나이대의 말끔한 중년 남자가 자신의 다리 밑에 손을 넣는 척하며 손등으로 내 허벅지를 비비는 일 같은 것들이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때부터 나는 알게 모르게 대중교통에서 남자의 옆 자리를 피했을 것이고, 으슥한 길거리를 걸을 때엔 귀에서 이어폰을 빼는 것이 습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내 인생 책의 반열에 오른 권석천 작가의 <사람에 대한 예의> 중 아래 구절을 읽다가, 나의 편견을 뒤집어 볼 기회를 맞았다.
몇 해 전 몸이 결린다고 했더니 동료 논설위원이 요가를 권했다. 요가 학원은 신문사 건너편에 있었다. 한 클래스에 여성은 20여 명, 남성은 두세 명 정도였다. 맨 뒤 한쪽 구석에서 뻣뻣한 몸으로, 나무늘보처럼 슬로비디오로 버퍼링만 계속하고 있었다. (생략) 한 달쯤 지났을까. 수업이 끝나고 학원 문을 막 나서려는데 한 젊은 여성이 원장님께 뭔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원장님. 남자들하고 반을 따로 만들어주시면 안 돼요?"
"왜 그러시는데요?"
"힐링이 안 돼요! 힐링이."
(생략)
난 힐링이 안 되는 존재라는…. 중년 남자와 요가를 배우는 게 찜찜하고 불편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생략) 여성들은 남성들의 사회에서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심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살지 않았겠는가.
- 권석천, <사람에 대한 예의 중>
나와 성이 다른 사람에게 '힐링이 되지 않는 존재'라고 하거나 '불가피하게 너의 몸을 터치해도 불편해하지 말라'는 말이나 모두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권석천 작가의 말처럼, 그 폭력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은 명백하지만, 다른 한쪽이라고 해서 그런 폭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는 것을. 남자 강사가 내 몸에 터치를 하기도 전부터 나는 이미 그와 차 안에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 여자 강사에게선 느끼지 못한 불편함을 느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