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을 준비하던 시절, 가족들이 주는 용돈 외엔 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열 가지가 넘는 아르바이트를 해왔지만 1년도 못 채운 회사에서 퇴사를 한 후에는 얼른 재취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아르바이트를 구할 겨를은 없었다. 아니, 그건 변명. 직장 한 번 다녀본 게 무슨 대수라고 직장인에서 다시 아르바이트생으로 강등되고 싶지 않았다.
취업 준비라고 해봤자 크게 하는 일은 없었다. 토익 시험 점수를 700점대에서 800점대로 올리거나 회사에 가면 어차피 다 잊어버리는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을 따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아주 많아졌고, 또 좋은 교육 기관을 많이 알게 되었지만 그땐 그것밖에 몰랐다. 만약 지금 내가 다시 취업 준비생으로 돌아간다면 요즘 대세 코딩도 배우고, 서울의 예쁜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데 더 많은 투자를 했겠지만, 그땐 불안감이 큰 만큼 시야는 좁았다.
가족에게 손 벌리는 일이 참 싫었다. 내 성격에 어떻게든 나가서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하는데, 백수 기간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그렇다고 또 어디선가 쪼그려 앉아 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다면 ‘돈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 돈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게 정말 없다. 친구를 만나려면 교통비가 필요하고, 밥값이 필요하고, 커피값이 필요하다. 먼저 취직한 친구가 저 옷가게 좀 들어가 보자고 하면 같이 들어가긴 들어가는데 멀뚱멀뚱 서 있다가 나왔다. 쇼핑을 좋아하는 애가 그러고 있으면 친구 마음도 불편하고 내 마음도 불편하다. 엄마가 준 돈으로 플렉스 하는 일은 더 불편하다.
그래도 하루는 길어서, 시간을 보낼 일이 필요했다. 돈이 없어도 갈 수 있는 곳은 도서관뿐이었고 돈이 없어도 대출할 수 있는 것은 책뿐이었다. 스펙에 바로 도움이 되지는 않더라도 나름 마음의 교양을 쌓는다는 자기 위안은 할 수 있었다. 이런 내가 문예창작학과 출신이라면 좀 놀라겠지만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잘 몰랐다. 처음엔 내가 해외여행을 무서워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외여행을 다니는지 궁금해서 여행 에세이를 주로 읽었다. 주야장천 여행 에세이만 읽다 보니 지루해져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취직을 하고 어떤 미래를 그리는지 궁금해서 자기 계발서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그런 내가 좀 이상해 보였을 수도 있다. 평소에 책을 안 읽던 애가 침대 머리맡에 책을 쌓아두고 책에 빠져 있었으니 말이다. 책이 재미있어서 읽었다기보다는 돈을 벌지 않는 내가, 나름의 교양을 지키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편협한 생각이었으나 그땐 책이라도 붙잡고 싶을 만큼 절박했다. 무슨 일이든 반복이 되면 습관으로 자리 잡는 법. 언제부턴가 도서관에 없는 책은 용돈을 쪼개서라도 직접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내게 독서는 돈이 없어서 하는 활동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면 접할수록 나의 생각은 좁은 골목길을 지나 넓은 대지로 펼쳐지고 있었다.
“유수진님, 합격입니다.”
긴 공백기를 마치고 다시 취직을 했다. 맡게 된 일은 이전에 하던 출판 편집이 아닌, 소프트웨어 교육 PR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길, 생각지 못한 도전 앞에서도 예전만큼 두렵진 않았다. 취업을 준비한다는 변명의 시간 동안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나 자신에게 되묻고 되물었기에.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책을 읽은 후의 나는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내가 책을 쓰는 작가가 된 이유이자 5년 가까이 매일 출근길마다 책을 읽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