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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Aug 16. 2020

좋은 이야기만 할 거면 인스타그램이 낫다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고들 한다. 잘 먹고 잘 사는 이야기만 보여주고 싶어서다. 그것이 현실의 전부가 아님을 알면서도, 인스타 세상에 발을 담그는 순간, 나만 불행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나라고 다를까. 무례한 사람 때문에 기분을 망친 날, 나의 몇 안 되는 좋은 소식을 인스타그램에 게재한다. 환하게 웃는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본 지인들은 '예쁜 데 갔네!', '좋아 보인다!'라고 메시지를 보낸다.


'아니, 나 잘 못 지내'라는 이야기를 꺼내기가 껄끄럽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고, 징징거리기엔 내 나이가 징그러운 것 같고, 내가 '선택'한 가족이 얽힌 이야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는 만큼 고민의 무게도 무거워지는 탓. 그 고민을 꺼내는 데까지 걱정이 길어진 탓. 철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불쌍하게 보지는 않을까. 마음 놓고 누군가에게 "나 고민이 있어"라고 입을 떼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친구나 지인이 내게 고민 상담을 청해 오면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아무나한테'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을 '나에게만' 털어놔 주었을 터. 그들은 나에게만은 굳이 '잘 사는 모습만'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이 털어놓는 절망적인 고민이 그들의 인생에 겨우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니까. 그 일부보다는, 일부 바깥에 있는 #행복 에 더 큰 응원을 보내줄 사람이라고 믿으니까. 그 마음이 고마울 뿐이다.


한 번은 지인이 심각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처음엔 피식,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그 고민을 밝힐 수는 없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고민은 A라는 일이 벌어질까 봐 걱정이었는데, A가 현실화될 확률은 내가 보기에 0.0001%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였다. 하필 안 좋은 일을 여러 차례 겪은 시기여서 더 그랬을까. 마음이 약해진 그는 0.0001%의 확률마저도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헛웃음을 삼켰다. 아무리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라 해도 내가 겪어보지 않은 고민을 확률 따위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럴 일은 없어"라는 말보다는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변함없이 너의 옆에 있을게"라고 말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 고민은 황당한 해프닝으로 지나갔다. 그는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근데 그때는 정말 힘들었어" 하며 나에게 그 웃기는 고민을 어떻게 심각하게 들어줄 수 있었냐고 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느끼는 고통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 관계는 그 후로 더욱 견고해졌다.


죽도록 고통스러운 고민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는 건, 그만큼 그 사람을 의심 없이 믿는다는 것. 나의 고통스러운 고민이 누군가에게는 밤잠 괴롭히는 모기만큼이나 귀찮고 하찮은 일이 된 날, 깨달았다. 고민을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해 가슴에 곪게 만들어서도 안 되지만, 믿었던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가 발로 짓밟히는 일이 있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것을.


"우리 좋은 이야기만 하자"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내 인생의 빛나는 절망을 공유할 생각이 없다. 좋은 이야기만 할 것이라면 인스타그램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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