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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Jul 22. 2020

세상 가장 심각할 줄 알았던 사람들의 유머러스

지난 <유 퀴즈 온더 블록> 방송에 박일환 전 대법관님이 출연했다. 딱딱하고 다가서기 어려운 이미지일 거라는 예상을 뒤집은 건, 퇴임 뒤 그가 하고 있는 활동 때문이었다. 유튜브 크리에이터. 그의 이름 석자 뒤에는 이제 ‘대법관’이라는 타이틀 대신 ‘크리에이터’가 붙는다. 딸의 제안으로 시작한 유튜브 활동을 통해 그는 생활 법률 지식을 알기 쉽게 전하고 있다. 수익 창출은 하지 않는다. 어린 학생들도 자신의 영상을 볼 텐데 굳이 광고를 보게 하고 싶지 않다고.

그의 이전 직업은 인자한 얼굴과 왠지 어울려 보이지가 않았다. 험하고 거친 수많은 사건, 사고들을 스쳐온 삶이라기엔 수줍은 웃음에 따스함이 가득해서. 그는 요새 구독자들이 남겨주는 댓글과 응원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며, MC 유재석 씨와 조세호 씨의 질문마다 웃음으로 답했다. 왜 대법관이라고 하면 꼭 근엄하고, 차가운 인상부터 떠올랐을까. 매일 고시 공부를 하는 기분이었다고 할 만큼 고된 일을 해왔지만 그는 여느 성격 좋은 순댓국 주인아저씨와 다르지 않은, 아주 작은 행복에도 쉽게 감흥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날 방송에는 박일환 전 대법관뿐만 아니라 판사, 변호사, 보안 관리대 경위 분들도 함께 출연했다. 특히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는 대부분의 변호사들이 기피하는 재심 사건을 담당한다.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사건 등을 맡아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들을 돕고자 했으며 누명을 쓴 분들의 트라우마를 이해하고자 심리 공부까지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날 방송에 부산 엄궁동 살인사건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무려 21년간 복역한 피해자 장동익 씨도 함께 출연했는데, 두 분 모두 그 풍파를 거쳐온 분들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서글서글한 미소가 얼굴에 배어 있었다. 박 변호사는 힘들었던 옛일을 회상하면서도 본인의 머리숱이 많지 않으니 카메라에 너무 부각되지 않게 예쁘게 담아 달라며, 콤플렉스를 웃음으로 승화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인터뷰 내내 들려준 대답과 모든 제스처에서 유머러스함이 가득함을 느꼈다. 그들이 매일 수만 장의 기록들을 살피며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일상의 작은 유머러스를 놓치지 않으려는 섬세함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얼마 전 내 친구에겐 살면서 겪어본 적 없던 큰 사고가 닥쳤다. 다행히 잘 해결되었지만 그 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친구는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하며 큰 우울감을 느꼈다고 했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의 일상이 그토록 그리울 줄 몰랐다고.


길거리를 걷다 아무 이유 없이 묻지 마 폭행을 당할 수도 있고, 횡단보도를 건너다 음주 운전 차량에 치여 죽음을 맞기도 하는 세상이다. 나에게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고, 만약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억울해서 정상적인 삶을 이어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그런 억울함에 뛰어들어 함께 싸워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얼마나 든든하고 감사한 일인가. 고통의 바다에 같이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수면 위로 올라가기 위해 끊임없이 함께 발버둥을 쳐주는 힘은 어디에서 발현되는 것인가.

유머러스다.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찰나의 순간에 사람 냄새를 더하는 일이다. 약속 하나 잘 지키면 될 일이 법정으로까지 번지기도 하지만, 조금이나마 선량한 사람의 편에 설 수 있는 힘은, 결국 우리가 고통을 이겨내고 찾아내야만 하는 일상의 소소한 유머러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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