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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Sep 29. 2020

이미 알아야 할 것은 다 알아버렸는지도

만약 당신의 친구가 이런 고민을 털어놓는다면 어떤 말을 해줄 수 있겠는가? 20대 초반에 애인과 이별한 뒤 10년이 넘도록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아무리 심리 상담을 하고 종교 수행을 해봐도 아주 잠시 동안은 도움이 되는 것 같지만 금세 원상 복귀된다고.


정신건강의학과 정혜신 전문의가 진행하는 유튜브 정혜신 TV에 올라온 고민이다. 보통 친구들끼리 하는 연애 상담이라면 '누구나 겪는 이별이야, 털어버려'라든지 '네가 뭐가 아쉬워서 아직까지 눈물바람이야?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를 법 하지만, 글쎄.

 

유튜브 정혜신 TV 캡처

연애 고민이든 인생 고민이든, 누구나 한 번쯤 풀리지 않는 문제를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적이 있다. 지금의 내 머리로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어서 위 고민의 주인공처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답을 찾아보려고 했다. 이래저래 다 해봐도 답을 찾지 못하면 친구들은 탈탈 털어버리곤 하던데, 나는 끝내 풀리지 않는 문제를 놓지 못했다. 나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 묻고(또 묻고), 책이든 인터넷이든 정보란 모든 정보는 다 찾아보고, 무작정 길거리에 나가 혼자 뛰고 걸으며 머릿속 퍼즐을 맞춰보려 했다. 스스로 답을 찾을 때까지 붙들었다.


그래서 정혜신 전문의가 어떤 대답을 해줄지 궁금했다. 누군가 10년이 넘도록 풀지 못한 문제를 전문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턱 하니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이 분은 이미 알아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신 거예요”


짧은 편지 한 통으로 이 분의 이야기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본인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심리상담이든 종교 수행이든 정혜신 작가의 책을 읽든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본 것으로 판단된다. 심지어 이 유튜브에 고민 상담 편지까지 보내지 않았는가. 어디 이곳뿐만이었겠는가. 그래서 정혜신 전문의가 내린 답은, 이제 책도 그만 보고 상담도 그만 하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라는 것이었다. 이미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아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그다음에 할 일은 단 하나뿐이다. 이제 그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포기도 하나의 방법이다.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 아니다. 어쩌면 무언가를 붙드는 것보다 더 힘든 선택일지도 모른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시험지를 제출해야 할 때, 끝까지 시험지를 손에서 놓지 않고 선생님과 실랑이를 하던 친구가 있었다. 당시엔 그 친구가 정말 욕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친구는 욕심이 아니라 미련이 많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주어진 시간 동안 풀지 못한 문제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미련. 오히려 빈칸으로 제출하면서도, 시험지를 쿨하게 제출해버리고 매점에 빵을 사 먹으러 가는 친구들이야말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더 이상 미련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 친구가 나에게 저런 고민을 털어놓는다면 그동안 애쓰느라 수고했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이제 그만 푹 쉬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 깨닫는다. 세상에는 꼭 풀어야만 하는 매듭만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꼬인 것은 꼬인 그대로 놔둘 줄도 알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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