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간 20분. 출퇴근을 하는 동안 길바닥에서 보내는 시간. 집이 안양에 있다 보니 스무 살이 된 후부터는 줄곧 어딜 가든 3시간은 기본이었다. 대학교에 다닐 때에도,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에 갈 때에도, 국립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도, 직장에 다닐 때에도. 내가 체력이 달리는 줄만 알았다. 친구들과 만나서 놀다 보면 항상 내가 제일 먼저 지쳤고, 졸린 눈을 비비며 먼저 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친구들은 이제 분위기가 달아올랐는데 나는 항상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돌아갈 길이 멀었고, 노는 내내 집에 갈 걱정이 앞섰다.
경기도 안양이라는 위치가 참 애매해서 서울에 따로 집을 얻는 것은 경제적으로 효율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출퇴근길에 책을 읽거나 영어 공부, 멍 때리기, 사람 구경을 하며 나름 알차게 시간을 보내보려고 했다. 범계역에서 사당역까지 매일 15분 동안 책을 읽는 일은 1년, 2년 시간이 쌓이면서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외에는 출퇴근길이 길어서 좋은 점은 하나도 없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온몸에 힘이 다 빠졌고, 신경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버스에서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를 때도 있었고, 누군가 조금만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가도 불같이 화가 났다.
출퇴근 시간이 왕복 80분 이상 걸리면 연인과 헤어질 확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출퇴근 시간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뜻일 터. 내가 힘들었던 이유는 피로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생각이 너무 많아진다는 것'도 힘들었다. 사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바쁜 일상에서 놓치고 있던 것들을 천천히 다시 상기시켜볼 수도 있고,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던 일을 처음부터 다시 조립을 맞추듯 생각해볼 시간을 갖게 되기도 하니까. 그러나 좋은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을 하는 것과 이산화탄소가 가득한 지하철 안에서 생각을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출퇴근 시간 동안에 하는 생각은 계속 반복적으로 떠오르기 일쑤였고 출구도, 정답도 없는 같은 생각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은 고통이자 고문이었다.
재택근무를 한 지 한 달이 넘어섰다. 올해 초에도 재택근무를 했지만 그때는 이렇게 오래 재택근무를 하게 될지 몰라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잘 몰랐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출퇴근 시간에 소요되던 약 3시간을 얻게 되면서 일상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매일 아침 7시 알람 소리에 힘겹게 눈을 뜨던 내가 이젠 아침 9시에 자연스럽게 눈을 뜬다. 일어나자마자 몸에 물을 뿌리기보다는 천천히 스트레칭을 하고 편안한 상태에서 아침밥을 먹는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집 뒤에 있는 산을 오르고, 저녁에는 하천을 따라 걷는다. 여전히 에너지는 충만해서 저녁 시간을 이용해 글을 쓰거나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는 데 힘을 쏟는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일거리가 없는지 계속해서 정보를 탐색하고, 내가 도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가급적 모든 것에 도전한다.
출퇴근길에 3시간을 썼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올해의 버킷리스트도 이뤘다. 자그마치 3년 동안 노트에만 써놓고 끙끙 앓고 있던 버킷리스트를 이룬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어딘가에 새어 나가고 있던 에너지를 모은 덕분이었다. 하루에 3시간, 한 달이면 60시간, 1년이면 720시간. 나의 경험에 따르면, 출퇴근 시간이 왕복 80분 이상 걸리면 꿈꿀 수 있는 꿈의 크기가 작아질 확률이 높다. 지옥철을 타고 1시간 반을 달려 퇴근하는 나였다면 '아 몰라 몰라, 귀찮아. 내가 힘들어 죽겠는데 버킷리스트가 중요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루에 3시간은 사람을 이토록 변화시킨다.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9년차 마케터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 일글레 구독 신청하기 >>
https://ww-letter.stibee.com/?stb_source=url&stb_campaign=share_page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