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수진 Dec 01. 2020

남자 어른에 대하여

남자 어른을 좋아해왔다. 여기서 남자 어른이라 함은, 정장을 입어도 낯설지 않을 만큼의 나이를 먹고 '아저씨'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외향을 갖춘 남자일 것이다. 학교 선생님이든 회사에서 만난 사람이든, 웬만한 작은 일 따위엔 쉽게 놀라지도, 흔들리지도 않는 그들의 모습에서 '듬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자 친구들에게 하기엔 조심스러운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했고 그들이 옆에 있으면 위험한 것, 이를 테면 불 같은 것을 다뤄도 크게 걱정이 되지 않았다. 위험한 일이 생겨도 왠지 그들이 잘 해결해줄 것 같아서.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는 나와 달리, 큰 일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모습이 어른다운 모습 같았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동훈은, 사무실 무기징역수다. 남들 부러워하는 대기업 부장이지만, 어떻게든 동훈을 내쫓으려는 회사에서 어떻게든 잘리지 않고 붙어 있어야만 하는 애처로운 처지이다. 형제들은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고, 아내인 윤희는 동훈의 상사이자 대학 후배와 바람이 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없는 척,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하는 동훈은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좋은 남편이었지만, 윤희는 그런 동훈을 견디기 힘들다. 그리고 여기까지의 동훈의 모습이, 내가 생각해온 '남자 어른'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

그런데 진짜 남자 어른은 그런 것이 아니다. 동훈의 형인 상훈이 장사를 두 번 말아먹은 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청소 일을 하다가 실수로 건물주의 옷에 먼지를 묻힌다. 건물주는 온갖 욕을 하며 청소업체를 바꾼다고 했고, 사과를 하는 상훈에게 사과를 하려면 제대로 사과를 하라고 한다. 상훈은 결국 건물주 앞에 무릎을 꿇는데, 그 모습을 상훈의 어머니가 목격하고 만다. 이 사실을 안 막내 동생 기훈은 건물주를 죽여버린다며 소리를 질렀고, 동훈은 그저 묵묵히 기훈을 말렸다.


다음 날, 동훈은 과일바구니와 망치를 들고 건물주를 찾아간다.


"나도 무릎 꿇어본 적 있어. 뺨도 맞고 욕도 먹고... 그 와중에도 다행이다 싶은 건 우리 가족은 아무도 몰라. 내가 무슨 모욕을 당해도 우리 식구만 모르면 아무 일도 아니야. 어떤 일이 있어도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그러면 안돼. 식구가 보는 데서 그러면 죽여도 이상할 게 없어. "


건축구조기술사인 동훈은 건물주의 건물 건축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망치로 건물 벽을 부수며 우리 가족을 찾아가 사과하지 않으면 이 사실을 모두 밝히겠다고 말한다. 건물주는 바로 동훈이 사온 과일바구니를 들고 상훈의 가족을 찾아가 머리 숙여 사과를 한다.


남자 어른. 당황스럽고 화가 나는 순간에도 흔들림 없이 체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람들을 지켜내는 사람. 내가 어렸을 적부터 가져온 남자 어른에 대한 환상은 ‘앞모습 불과했고, 진짜 남자 어른은 뒤에서 과일바구니와 망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동훈이 밉다. 힘든 일이 있어도 어떻게든 혼자서 이겨내려는 동훈은 주변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남자 어른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아리다. 싫은데 또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