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브런치를 켰다. 브런치 바깥에서도 그다지 많은 글을 쓰지는 않았다. 피곤해서였을 수도 있다. 두 달 넘게 재택근무를 하다가 코로나의 추세가 안정화에 접어들면서 다시 정상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내 몸은 이미 아침 9시에 일어나는 데 적응이 되어버린 나머지 2시간 일찍 기상하는 일상이 힘겨웠다. 8회분 글쓰기 교육 영상 촬영을 위해 두 달간 교육자료를 만들고 안양에서 강동구까지 왕복 4시간 거리를 왔다갔다한 것도 한몫했다. 모든 촬영이 끝난 뒤 '조금 쉬어야겠다'라고 생각했는데 내 피곤함은 생각보다 아주 큰 것이었나 보다.
하루에 12시간 이상을 누워있고 잘 자지 않던 낮잠도 잤다. 사실 이 나날들은 '함부로 글을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의 나날들이기도 했다. 더 솔직해져 볼까? 최근 글을 쓰기가 싫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피곤해서였을 수도 있고, 언젠가 글에 쓴 것처럼 '나 자신이 싫어서'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아닌 그 무엇이 싫어서일 수도 있고. 이 모호한 이유들 속에 한 가지 덧붙은 이유가 있다면, 나는 예전보다 '쉽게'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내가 쓰는 글에 필요 이상의 기대를 걸게 되었고, 이 글이 무언가를 바꿔줄 것이라는 희망을 붙잡고 있었다.
내가 쓰는 글은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까? 애초에 그런 큰 기대를 갖고 글을 쓴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원했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괜히 글 탓을 하게 되었다. 진심을 다해 솔직하게 글을 썼는지 의심도 해봤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글에도 거짓은 없는 편이지만(정말 100% 거짓이 없을까?) 그렇다고 100% 솔직한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이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함이라면, 더 지독하게 솔직해져야 하는 것 아니냐며 안 그래도 피곤한 사람을 더 못살게 굴었다.
얼마 전, 박노해 시인의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라는 시를 읽었다. 지금 나는 단순한가, 지금 나는 단단한가, 지금 나는 단아한가 물었다. 지금 어딘가 엉켜있고 쉽게 부서질 듯 연약하며 순수하지 못한 내면을 갖고 있다면, 최대한 단순하고 단단하고 단아한 무언가를 좇아가라고 방향을 일러주는 듯했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부터 그리고 내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쓰고 싶은 글은 그런 글이다. 함부로 쓴 글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마도 단순하고, 단단하고, 단아할 것이다. 글은 상대방을 향해서도 함부로 쓰면 안 되지만, 나 자신을 향해서도 함부로 쓰면 안 되는 것이니까. 무언가를 바꿀 순 없어도 자신이 행복해지는 글을 써야만 할 테니까.
나에게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어리석은 것과 지혜로운 것,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식별하는 잣대가 있다.
좋은 것으로 나쁜 것을 만드는가
나쁜 것으로 좋은 것을 만드는가.
단순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가
복잡한 일을 단순하게 만드는가.
물질의 심장을 꽃피워내는가
심장을 팔아 물질을 축적하는가.
최고의 삶의 기술은 언제나 가장 단순한 것으로
가장 풍요로운 삶을 꽃피우는 것이니.
하여 나의 물음은 단 세 가지다.
단순한가 단단한가 단아한가.
일도 물건도 삶도 사람도.
내 희망은 단순한 것.
내 믿음은 단단한 것.
내 사랑은 단아한 것.
돌아보면 그랬다.
가난이 나를 단순하게 만들었다.
고난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고독이 나를 단아하게 만들었다.
그것들은 나를 죽이지 못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들은 나를 더 푸르게 하였다.
가면 갈수록 나 살아있다.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박노해,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