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 지안의 곁엔 어른이 없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자신을 때리는 사채업자를 칼로 찔러 죽였고, 그 후에는 사채업자의 아들에게 맞으며 사채 빚에 쫓긴다. 돈을 벌어다 줄 어른이 없어서 작은 몸으로 아르바이트를 두 탕, 세 탕을 뛰고, 요양원을 알아봐 줄 어른이 없어서 차디찬 단칸방에 할머니를 모시고 산다.
그런 그녀에게 처음으로 "같이 회식 가서 고기 먹자"라고 말을 해준 사람은 동훈이다. 동훈은 지안이 파견직으로 들어가게 된 삼안E&C 안전진단팀의 부장이다. '살인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늘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아온 지안은 스스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동훈에게도 못된 말을 쏟아내지만, 동훈은 지안이가 추운 겨울에 발목 양말을 신고 다니는 게 자꾸 눈에 밟힌다.
어른이 되고 싶어서 된 어른이 있을까. 어른이 무언지 알고 된 어른이 있을까. 동훈의 형인 상훈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는 말처럼 '먹고 싸고 먹고 싸고 징그럽도록 먹고 싸고 먹고 싸고' 했더니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지안이가 동훈을 만나 처음으로 생을 살아본 것 같다고 말할 때, 나는 그것이 '처음으로 어른을 만난 것 같다'는 말처럼 들렸다. 힘들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슬프면 전화할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살아볼 용기를 갖게 되니까. 동훈은 지안에게 어른이 되어주었다.
네가 먼저야.
네가 아무렇지 않다고 하면,
아무렇지 않은 게 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말이 있다. 상처를 받은 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상처 받지 않은 척 또다시 뜨겁게 사랑하라는 말이다. 내가 과거의 기억을 잊지 못해 힘겨울 때,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잊으라고 말했다. 그딴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냐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깨달았다. 경험을 한 사람도, 기억을 가진 사람도, 그리고 끝내 그 기억을 딛고 계속 살아내야 할 사람도 나라는 것을.
지안에게 잘해주었던 사람들도 지안이가 정당방위일지언정 살인 전과가 있다는 것을 안 후로는 멀어졌을 것이다. 몇 차례 그런 일을 겪으면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다. 내가 먼저 사람을 밀어내게 된다. 그런 지안에게 동훈이 말한다. 네가 아무렇지 않다고 하면, 아무렇지 않은 게 된다고. 자신의 가족이 그런 일을 당하면, 누구라도 그 사채업자를 죽였을 거라고.
한 번도 긁히지 않은 삶이 어디 있을까. 최근에 나는 주차장 기둥에 차를 긁어먹었다. 긁을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아침부터 정신이 나가 있었던 모양이다. 출근길 내내 나 자신에 대한 한심함과 분노로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고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동료들에게 한탄했다. 그러자 동료들은 자신이 처음 운전을 할 때 얼마나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들려주었는데 사건사고들을 하나씩 듣고 나니 내 차에 난 긁힘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주차장에 세워진 차들만 둘러봐도 다들 그 정도 훈장쯤은 하나씩 갖고 있었다.
상처 난 데에 계속 소금을 뿌린 것은 내 못난 부분이 싫어 멀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못난 부분을 들킬까 봐 감추기 바빴던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른이 되기 전에 누군가 이런 말을 해주었더라면 아픈 과거의 기억을 조금 더 빨리 털어낼 수 있었을까.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는 모든 어른들이 부럽고 또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