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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Dec 16. 2020

에밀리는 에밀리의 법을 따르지

내 평생 가장 스트레스받은 순간 중 하나를 꼽자면 처음 소프트웨어 관련 회사로 이직한 첫날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 던져졌을 때의 그 막막함과 외로움은 말할 수 없이 큰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항상 앉아있던 자리는 편안함을 주지만 동시에 지루함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운 줄 알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찾곤 한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의 주인공 에밀리는 상사 대신 1년 동안 파리의 마케팅 회사, '사부아르'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시카고를 떠나 파리로 간다. 패션과 사랑의 도시, 파리로 떠난다는 행복감도 잠시, 장거리 연애로도 충분할 줄 알았던 시카고 남자 친구는 그녀가 파리로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별을 고하고, 파리에서 만난 상사인 '실비'와는 사사건건 모든 일에 부딪힌다. 에밀리가 시카고 본사에서 프랑스 회사에 온 것은 프랑스 회사의 문화를 따르기 위함이 아닌 미국인이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전해주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실비는 에밀리가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르는 것부터 시작해 회사가 추구하는 고상한 이미지와는 정반대인 SNS 마케팅 전략을 내세우는 것을 싫어한다.


넷플릭스 <에밀리, 파리에 가다>

회사 면접을 보러 가면, 그 회사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대한 번뜩이는 의견을 달라고도 하고, 새로운 관점을 나타낼 수 있는 과제를 내주기도 한다. 결국 지원자들의 아이디어를 뽑아가려는 술수가 아니냐는 말도 많지만, 그만큼 회사는 인재를 채용할 때 지원자가 얼마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가에 주목한다. 그렇게 어렵사리 회사에 들어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라치면  A류는 이미 어떠한 이유로 접은 적이 있어서 못하고, B류는 김 부장이 싫어해서 못하고, C류는 예산 때문에 못하고, D류는 우리 회사의 색깔과 맞지 않다고 했다(그럼 어쩌라고?).


그러나  회사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다 보면  회사의 결을 알게 된다. 누군가는  결에 종속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결에 맞추지 못해 튕겨 나가기도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에밀리처럼  결에 융화되면서도 자신만의 길을 찾기도 한다. 에밀리는 본인의 SNS 활용해 사부아르에서 맡은 일을 하나둘씩 성공시켜 나가고, 프랑스어도 배우고, 프랑스 남자도 만나고, 프랑스 친구들도 사귀면서 프랑스 사람과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혀 나간다. 에밀리를 비웃던 불친절한 회사 동료들은 결국 에밀리의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실비 역시 그런 그녀를 해고하지 않고 계속 같이 일하기로 결정한다. 기름과  같은 이방인이었던 에밀리가 비로소  속에 녹아든 치즈처럼 프랑스에 빠져든 것이다.


지나온 내 커리어를 돌아보면, 나는 회사의 결에 종속된 사람이기도 했고, 맞추지 못해 튕겨 나간 사람이기도 했고, 에밀리처럼 그 결에 융화되면서도 나만의 길을 찾은 사람이기도 했던 것 같다. 출판사 경력밖에 없던 내가 소프트웨어 관련 회사에 입사한 초반엔 소프트웨어의 '소'자도 모르는 골칫덩어리 직원이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엔 딱딱한 소프트웨어 지식을 말랑말랑한 콘텐츠로 전달하는 마케터가 되어 있었다. 시카고든, 파리든 에밀리는 에밀리의 법을 따르면 되고, 회사원이든 아니든 나는 나의 법을 따르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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