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노트북은 게으른 나를 부지런한 작가로 만든다

의지를 가지려고 애쓰지 말고 환경을 만들자!

by 유수진

올해 초, (매년 무의미한 줄 알면서도) 새해 계획을 짤 때, 마음의 짐과도 같았던 글쓰기는 절대 빠질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도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하루 온종일 본 노트북을 또 들여다보며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기존에 갖고 있던 노트북은 느려서 전원 버튼을 누르기가 망설여졌고, 답답한 방구석을 벗어나 카페에 나가려고 해도 노트북이 너무 무거워서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노트북을 하나 살까?


막상 노트북을 새로 사자니 집에 있는 노트북이 딱히 못 쓸 정도도 아닌 것 같아 망설여졌다. 꼭 다이어트를 마음 먹은 사람이 새 운동복부터 사러 백화점에 가는 느낌이랄까? 정말로 다이어트를 할 의지가 있다면 열심히 운동을 하는 게 중요하지, 어떤 옷을 입고 운동을 하든 뭐가 그리 대수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또 시간만 흘러 지난 해와 다를 바 없이 아무 글도 쓰지 못하고 지나가게 될까봐 겁이 났다. 나는 백만원이 훌쩍 넘는 노트북 가격에 몇날 며칠을 망설이다가 결국 나에게 속는 셈 치고 새 노트북을 질러버렸다.

새 노트북을 산 후 나는 내 평생 가장 자주, 정기적으로, 진심으로 재미있게 글을 쓰고 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노트북을 켜는 일이 기대되고, 노트북 무게가 가벼워서 침대에 앉아 다리에 올려놓고 글을 쓰다 잠이 들 정도다. 때론 친구를 만나기 전에 먼저 카페에 노트북을 가지고 나가 글을 쓰기에도 부담이 없다. 그저 새 노트북 하나를 샀을 뿐인데, 그동안 그렇게도 쓰기 어려웠던 글이 술술 써지는 신기한 경험이다. 제대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게 올해 2월이고, 지금까지 쌓인 글이 총 58편이니까 약 3일에 한 편 꼴로 글을 써온 셈이다. 즉, 나는 그동안 글을 쓸 의지가 없었던 게 아니라 글을 쓸 환경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다이어트를 마음 먹은 사람이 새 운동복부터 사는 것은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간만에 운동을 하러 나가려고 하는데, 다 늘어진 티셔츠밖에 없으면 일단 밖에 나갈 맛이 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허세'나 '겉멋'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딱 달라붙는 타이츠에 세련된 운동화를 신으면 운동을 하러 나가는 기분이 훨씬 더 상승하지 않겠는가? 공부를 하겠다며 색깔별로 펜을 사거나 책상을 치우느라 한 시간을 쏟는 수능생들의 마음도 비슷한 것 같다. 누군가에겐 괜히 공부하기 싫어서 하는 행동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공부를 시작하기 위한 경건하고도 엄숙한 초기 환경 셋팅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실천'도 '환경'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얼마 전 다녀온 여행도 몇 번을 망설였지만 비행기 티켓을 구매하고 인쇄하는 순간 모든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고, 작년 말부터 회사에서 사업PM을 맡게 됐을 땐 '내가 어떻게?' 라는 생각부터 들었지만 막상 그 환경 안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다보니 사업이 움직이고 돌아갔다. 대학생 땐 팀 프로젝트를 해야하는 일이 있으면 죽어도 발표 역할은 맡지 않았는데 직장인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발표를 해야 하는 환경이 생기니 잘 하지는 못해도 무슨 말이라도 내뱉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새로운 변화를 만들고 싶지만 마음이 잘 움직여주지 않을 때, 의지를 갖지 못하는 자신에게 답답하고 화가날 때가 있다. 그럴 땐 의지를 가지려고 하지 말고 환경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살을 빼고 싶으면 운동복을 사서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고, 발표를 잘하고 싶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발표를 자원해서 사람들 앞에 서보는 것이다. 새 노트북이 게으른 나를 부지런한 작가로 만들어준 것처럼 새 운동복이, 무대 앞에 선 그 순간이, 새로운 나를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언젠가 또 글쓰기가 힘들어지면, 그때는 나만의 작고 조용한 작업실을 만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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