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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Dec 10. 2020

나의 공간에 외부인이 방문했을 때  

얼마 전 작업실에 들어왔는데 내가 일부러 버리지 않고 남겨 두었던 플라스틱 그릇이 없어졌다. 언니가 작업실에 왔다가 쓰레기인 줄 알고 버린 것이다. 그것은 누가 봐도 쓰레기임이 분명했기 때문에 언니가 그것을 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고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 번뜩 떠오른 아이디어를 메모지에 썼다가 '에이, 이딴 아이디어는 어디에도 쓸 데가 없어!' 하며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음날 '아냐! 그거야말로 100억 가치의 아이디어였어!' 하며 다시 쓰레기통을 뒤지려는데 누군가 이미 쓰레기봉투를 내다 버린 후면 안될 것 같았다.


물론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예시이지만, 짚고 넘어갈 문제 같았다. 언젠가 집에서 아빠가 신발장 정리를 하다가 내 멀쩡한 버켄스탁을 버려서 뒤집어진 적이 있었다. 버켄스탁 슬리퍼가 원래 조금만 신어도 밑바닥에 발바닥 자국이 남게 되는데, 아빠가 보기엔 슬리퍼가 낡아보였던 모양이다. 내 물건을 묻지도 않고 버린 것이 무척 화가 났는데, 한 집에서 같이 살다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이미 내다 버린 것을 어쩔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내 공간에서만큼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나 이외에 유일하게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언니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요즘, 종종 친구들도 방문하고 있으니 그때마다 하나하나 말하기 번거로운 것들을 정리해두기로 했다. 이를 테면, 얼마 전에 친구가 작업실에 방문했다가 변기가 막히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변기 수압이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친구가 화장실을 쓴다고 했을 때 그것을 이야기해줄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미리 알려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친구는 그날 화장실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가끔 친구의 신혼집에 가면 목이 말라도 내가 직접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마시기가 조심스러웠다. "나 물 마셔도 돼?"라고 묻고 마신다. 남의 집 냉장고 문을 함부로 여는 것은 실례라지만, 친구네 집에 갈 때마다 물을 마셔도 되냐고 물어보는 게 조금 어색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그렇게 물으면, 친구는 뭘 그런 걸 묻냐며 당연히 마셔도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묻게 된다. 그게 기본적인 예의가 맞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누군가 내 공간에 방문한다면 당연히 물은 셀프로 마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주었으면 했다. 이곳에선 굳이 나에게 "물 마셔도 돼?"라고 묻지 않아도 됨(그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룰)을 미리 알려주고 싶었다.


작업실에 있는 시간이 쌓이다 보니 내 공간에 외부인이 방문했을 때 알아두면 좋을 팁이나 지켜주었으면 하는 목록들이 여러 개가 생겼다. 그래서 마치 에어비앤비 주인처럼 방문 가이드를 작성해 냉장고 옆에 붙여 두었는데, 쭉 적고 나니 내가 이 공간과 참 많이 친해졌구나, 금세 잘 적응했구나 싶다. 입주하고 초반엔 이곳에서 샤워를 하다가 온수를 켜는 것을 깜빡해 샤워하다 말고 온수를 켜러 나오는 일이 잦았는데 이제는 그런 일도 드물고, 화장실 구조상 샤워를 하면 물이 잘 빠지지 않아 불만이었는데 샤워를 하는 중간중간 물을 발로 배수구 쪽으로 밀어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누가 와서 이 공간을 쓰더라도 좀 더 편안하게 사용하다가 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는데, 이제 보니 이것은 공간에 쌓인 내 시행착오의 흔적들 그리고 내가 사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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