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수진 Jan 02. 2021

텔레비전 소리가 안 들리는 집

예상보다 꽤 괜찮은 가격에 작업실을 구했다고 생각한 요인 중 하나는 TV였다. 집에 있는 것보다 크진 않지만 존재의 유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TV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흡족했다. 나보다 먼저 자취를 시작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차피 요즘엔 노트북이나 태블릿으로 영상을 찾아보기 때문에 굳이 TV를 사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TV 없이 살 수가 있단 말인가! 나도 태블릿으로 넷플릭스도 보고, 유튜브도 보는 사람이지만 그건 TV가 아니다. 모름지기 집에서는 TV 소리가 나야 사람 사는 공간답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 우리 집에선 TV 소리가 났다. 아침에 가장 먼저 일어난 사람이 TV를 켰고, 모든 가족이 외출을 하지 않는 이상 TV가 꺼져 있는 상황은 드물었다. 집에 누가 있는데 TV 소리가 나지 않으면 어색했고, 누가 없어도 TV 소리가 나지 않으면 적막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집의 bgm 같은 것이었다. 아침을 먹을 때는 '삼시세끼'나 '나혼자산다'와 같이 여느 집에서 나눌 법한 대화가 오고 가는 프로그램을 틀어놓았고 저녁으로 치킨을 시켜 먹을 때는 '신서유기'나 '런닝맨'처럼 작정하고 웃기는 프로그램을 틀어놓는 것이 자연스러운 법칙이었다.


그래서 작업실의 TV도 꽤 유용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 작업은 안 하고 TV만 보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작업실을 구하고 초반에는 작업실에 들어오자마자 집에서처럼 TV부터 틀었다. 샤워를 할 때 바깥에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면 조금 무서울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이상하게 TV 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졌다. 그 좋아하는 '삼시세끼'를 틀어놔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TV를 끄고 유튜브에서 재즈 음악을 찾아 틀었다. 가끔은 재즈 음악마저 시끄럽게 들려 아예 아무 소리도 만들지 않았다. 귀가 고요해질수록 시선은 자연스럽게 창밖 풍경에 두거나 책으로 갔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게 불편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만의 공간을 얻고서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함을 즐기게 됐다. 나만 조용하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집. 평생 그런 공간을 가져본 적 없어서인지 내게는 그것이 엄청난 특권처럼 느껴진다. 누군가는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는 것이 쓸쓸하다고 하지만(나도 그렇게 느낄 때가 있지만), 평생을 시끌벅적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조용함이 주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하다. TV 소리가 채우던 시간을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다이어리를 쓰거나 요가를 하거나 아무 생각을 안 하는 데 쓰면서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업실에선 TV를 켜지 않는 게 기본 옵션이 되었다. TV가 있어도 TV 소리가 들리지 않는 작업실이 좋다.  TV 수신료가 조금 아까울 뿐.

매거진의 이전글 오피스텔에서의 사생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