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31일. 지인과 작업실에서 조촐한 연말 파티를 하기 위해 회사 휴가를 내고 오후 3시쯤 본가에서 작업실로 이동했다. 지인이 차를 가지고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보통은 차단기가 항상 열려 있어 굳이 방문 차량으로 등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다른 지인이 차를 가지고 작업실에 방문했다가 관리인도 없고 차단기도 내려와 있어 난감했던 상황을 겪은 후, 얼른 31일에 오기로 한 지인의 차를 방문 차량으로 등록하기 위해 관리사무소로 갔다. 그런데 관리인 분께서 메모지에 파란 매직으로 'OOO호 방문차량'이라고 크게 써주시기에 방문 차량 시스템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차를 주차해놓고 지인이 도착하기로 한 오후 4시쯤 관리인 분이 상주하고 계실 예정인지 문의하러 갔다. 똑똑, 노크를 하고 인사를 하자 오피스텔 주변에서 자주 마주치던 관리인 분이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일찍 퇴근하셨네요. 학교 선생님이세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 훅 들어왔다. 처음엔 무슨 말씀이신지 어안이 벙벙하다가 생각해보니 보통의 회사원이라면 지금쯤 회사에 있을 시간이었다. 그리고 반차를 내거나 휴가를 낸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라면, 학교 선생님과 같은 직업이어야 이 시간에 퇴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겠다 싶었다. 사실 나는 이날 휴가를 내지 않았더라도 재택근무 중이니 작업실에 있을 수 있는, 재택근무가 가능한 직종의 회사원이고, 오피스텔을 주거 목적보다는 작업의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모든 사실을 그 자리에서 다 설명할 순 없었다. 그저 "아, 아니에요. 회사원이에요."라고 얼버무리며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가족 단위로 사는 것이 일반적인 아파트와 달리 1인 혹은 다양한 형태의 2인 가구가 대다수인 오피스텔은 여러모로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아파트에서는 앞집에 딸이 몇 명이고, 윗집에 아들이 몇 명인지 금세 알 수 있지만 오피스텔에서는 복도에서 사람을 마주치는 일도 드물고, 3개월 이상 살아봐도 여기엔 누가 살고 저기엔 누가 사는지 대충이라도 감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오피스텔에서는 서로의 사생활을 아파트보다 더 모른 척해야 할 것만 같은 왠지 모를 기분도 들었다.
어느 날은 내가 사는 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데,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 위치한 집에 거주하는 분이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집 문을 여는 동시에 그분도 뒤에 있던 나를 의식한 듯 살짝 뒤를 돌아봤는데, 내가 괜히 집안을 훔쳐보는 것처럼 보일까 봐 얼른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12월 31일, 관리사무소에 내려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한 사람이 이곳에 처음 온 듯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그때 그 엘리베이터 바로 앞집에 초인종을 눌렀다. '저 집도 우리처럼 오늘 파티를 하려나?'하고 생각하던 찰나, 엇, 내가 그걸 왜 넘겨짚고 있지?
취업준비생이던 시절, 나는 미용실에 가는 게 조금 두려웠다. 머리를 하다 보면 미용사 분께서 내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묻고는 했는데 직업이 없던 나에겐 그 질문이 아프게 들렸기 때문이다. 때로는 아직 학생이라고 대답하기도 했고, 솔직하게 백수라고 대답하기도 했고, 정말 귀찮을 때는 그냥 회사원이라고 대답한 적도 있다. 내게 학교 선생님이냐고 물어보신 관리인 분도, 내 머리를 말아주신 미용사 분도 모두 악의 없는, 가벼운 인사 정도의 질문이었다는 것을 알지만 순간적으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긴 백수 시절을 건너온 내 지난 기억 때문에 더 당황스럽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고.
엘리베이터 바로 앞 그 집은 문을 여닫을 때마다 신경이 쓰일 것 같다. 문이 열리는 순간 마주친다면, 언제라도 시선을 다른 곳에 둘 준비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