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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Jan 10. 2021

사는 곳에는 각자의 이유가 있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본가에 약 15년 전쯤 이사를 왔다. 다니고 있던 고등학교에 그대로 다닐 만큼 원래 살고 있던 동네와 크게 멀어지진 않았지만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들과 더 이상 걸어서 만날 수는 없을 만큼 멀어졌다. 이사를 오기 전에는 딱히 약속 시간을 잡지 않아도 누군가 '큰 나무 앞에서 만나자!' 하면 우리 동네에 있는 가장 큰 나무 아래에서 곧바로 만나곤 했는데, 이사를 온 후로는 약속을 잡는 것조차 일이 되어버렸다.


그건 아주 작은 불만에 불과했다. 버스로 역까지 분명히 10분 거리라고 했는데 도로에 차가 없는 첫차를 타면 가능했다. 종점에 위치한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 자주 이용하는 역까지 가는 마을버스는 단 한 노선이기 때문에 버스는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게다가 이사를 온 초반에는 운행 버스 수가 적어서 배차 간격은 기본 10분 이상이었고, 20분 이상으로 길어질 때가 잦았다. 종점에서 내려도 언덕이 높은 우리 아파트까지 걸어 올라가는 것은 여간 버겁고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약속 시간에 늦는 친구들이 있으면 불같이 화가 났다. 나는 약속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남들보다 두 배 먼저 서둘러 나왔기 때문이다. 역 코앞에 살면서 게으름을 피우다 늦게 나온 친구에게 길거리 한복판에서 전화기에 대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른 적도 있다. 친구는 뭘 그런 걸로 그렇게까지 화를 내냐며 적잖이 당황했지만, 나에겐 그만큼 화가 나는 일도 없었다. 내가 약속 시간에 민감한 편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사는 곳에서 받아온 영향이 컸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 집에 좋은 점이 하나가 있는데, 걸어서 1분 거리에 산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사를 온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조금씩 산을 타기 시작했다. 주말에 집에서 공부를 하다가 지치면 리프레쉬를 하기 위해 한 번씩 산을 탔고, 그것이 습관이 돼 20대 내내 취미로 혼자 등산을 했다. 여러모로 힘들었던 시기에 도망치듯 산으로 올라갔다. 입구를 지나 나무가 빽빽한 숲 속으로 들어서면 그때부터는 복잡한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친구들과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동네에 도착하면 술기운이 싹 달아났고, 하루 종일 체기로 고생한 날에도 산 공기를 한 번 마시면 시원하게 트림이 쏟아졌다. 자주 등산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체중 관리도 됐고, 고등학생 때보다 확실히 키도 더 자랐다(진짜다!).


아무리 그래도! 위치만큼 중요한 건 없었다. 작업실을 구할 때 가장 중요한 조건은 죽어도 위치였다. 본가에서 역까지 버스를 타고 나오는 시간을 줄일 수 있도록 역과 가까운 곳이어야 했다. 다행히 신호등 하나만 건너면 역 입구로 쏙 들어갈 수 있는 곳에 작업실을 얻었고, 작업실에서 출퇴근을 하면 왕복 40분 정도의 출퇴근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하루에 40분, 일주일이면 200분, 한 달이면 800분. 거주하는 공간을 옮김으로써 한 달에 13시간을 공짜로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길바닥에 버려지는 체력을 더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참 징그럽게도, 작업실에서 잠을 자는 날이면 마치 고향을 떠나온 사람처럼 눈 뜨자마자 간절히 산이 그리워졌다. 작업실 앞에도 작은 공원이 하나 있어 재택근무 중에도 종종 그 주변을 돌며 산책을 하기도 했지만, 등산을 하는 것만큼 개운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운동이란 자고로 맑은 산 공기를 마시며 혼자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맛이니까. 그렇게 맛을 들여 버렸으니까.


친구들과  앞에서 헤어질 때마다  길이 너무 멀어 고생이겠다는 친구들의 위로의 말을 들으면 얼굴은 죽는시늉을 했지만 사실 맘속으론 그곳만   집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독립을  거면 회사와 가까운 곳으로 가야지, 겨우 본가에서 (차로) 7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냐며 의아해했지만 나는 알고 있다. 산이 있는 집에 가고 싶을 ,  언제든   있는  좋은 거리에 작업실을 구했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내가 지금의 작업실을 떠날 때에도 이곳과 많이 멀어질  없는 징글징글한 이유가 생겼으면 좋겠다. 


엄마처럼 휴대폰 앨범에 죄다 산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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