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에 첫 입주를 한 날, 싱크대 하부장을 열어보니 몇 통의 식용유와 연어 통조림이 있었다. 음식물 이 묻었는지 끈적끈적한 검은 봉투에 담겨 있었는데, 전에 살던 사람이 이사를 할 때 깜빡 잊고 놓고 간 것인지, 다음에 입주할 사람을 위해 일부러 두고 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후자의 확률이 있다고 생각한 건 내가 세상을 너무 아름답게 보고 있는 것일까?). 어차피 나는 작업실에서 조리를 할 생각도 없고, 이 물건 때문에 전 입주자에게 연락을 할 정신도 없고, 만약 필요하시다면 연락을 주실 거라 생각하며 일단 그대로 두고 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부동산 사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에 살던 사람이 놓고 간 물건이 있다던데, 그런 게 있는지 물었다. 나는 갖고 있던 새 종이백에 식용유와 통조림을 옮겨 담아 1층에 있는 부동산으로 바로 가져다 드렸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내 공간에 남의 물건이 남아있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찝찝하고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나 보다. 사장님께 가져다 드린 후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작업실로 다시 올라와 공간을 둘러보았다. 이제 이 공간은 누구의 흔적도 없구나, 온전히 나만의 흔적을 쌓으며 살면 되겠구나, 생각하며 빈 서랍들을 내 물건들로 하나둘씩 채워나갔다.
내 공간이 생긴다면 수건만큼은 집에서 쓰던 각종 백일, 결혼, 대회 기념용 수건이 아닌, 부드러운 호텔용 수건을 쓰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래서 작업실 계약을 마치고 몇 가지 생필품들을 구입할 때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이 고급스러운 그레이 색 수건이기도 했다. 다행히 작업실 내 화장실엔 수납공간이 넉넉해 내 사랑스러운 호텔용 수건들을 차곡차곡 쌓아놓았는데, 작업실에 적응을 하는 동안은 샤워를 하지 않았으므로 위칸에 있는 수건을 쓰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드디어 위칸에 있는 수건을 쓰던 그날, 나는 그보다 더 위칸인 가장 위칸에 검은 봉투가 삐져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 저건 또 무엇인가. 나는 봉투에 손을 뻗었다가 말았다. 왠지 그 봉투에는 손을 대기가 쉽지 않았다. 봉투 바깥을 만질 용기도 없었다.
입주한 후로 작업실에는 많은 지인들이 방문했으므로 지인에게 대신 꺼내 달라고 부탁하거나 아니면 내가 용기 내어 꺼내는 동안 옆에 있어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굳이 그 봉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실 봉투를 열어보지 않고 위 손잡이만 잡아 쓰레기통에 버리기만 하면 되는데, 남의 물건을 함부로 버리기도 찝찝하고, 무엇인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 돌려드리겠다고 말하기도 이상했다(굳이 전화까지 할 만한 물건일까?). 생활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대로 두는 내 이상한 성격은 그 후로 오랫동안 내 삶의 한 부분으로 달고 살고 있다.
이 검은 봉투를 언제 처리하게 될까? 이 작업실을 쓰는 내내 내 흔적 이외의 흔적이 계속 따라다닐 거라 생각하니 그것 또한 찝찝하다. 나는 예민한 사람일까, 무딘 사람일까. 이 작업실에서 나갈 때는 내 물건들을 잘 챙겨나가야겠다. 검은 봉투는 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