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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Jan 08. 2021

전 입주자가 놓고 간 검은 봉투

작업실에 첫 입주를 한 날, 싱크대 하부장을 열어보니 몇 통의 식용유와 연어 통조림이 있었다. 음식물 이 묻었는지 끈적끈적한 검은 봉투에 담겨 있었는데, 전에 살던 사람이 이사를 할 때 깜빡 잊고 놓고 간 것인지, 다음에 입주할 사람을 위해 일부러 두고 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후자의 확률이 있다고 생각한 건 내가 세상을 너무 아름답게 보고 있는 것일까?). 어차피 나는 작업실에서 조리를 할 생각도 없고, 이 물건 때문에 전 입주자에게 연락을 할 정신도 없고, 만약 필요하시다면 연락을 주실 거라 생각하며 일단 그대로 두고 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부동산 사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에 살던 사람이 놓고 간 물건이 있다던데, 그런 게 있는지 물었다. 나는 갖고 있던 새 종이백에 식용유와 통조림을 옮겨 담아 1층에 있는 부동산으로 바로 가져다 드렸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내 공간에 남의 물건이 남아있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찝찝하고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나 보다. 사장님께 가져다 드린 후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작업실로 다시 올라와 공간을 둘러보았다. 이제 이 공간은 누구의 흔적도 없구나, 온전히 나만의 흔적을 쌓으며 살면 되겠구나, 생각하며 빈 서랍들을 내 물건들로 하나둘씩 채워나갔다.


내 공간이 생긴다면 수건만큼은 집에서 쓰던 각종 백일, 결혼, 대회 기념용 수건이 아닌, 부드러운 호텔용 수건을 쓰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래서 작업실 계약을 마치고 몇 가지 생필품들을 구입할 때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이 고급스러운 그레이 색 수건이기도 했다. 다행히 작업실 내 화장실엔 수납공간이 넉넉해 내 사랑스러운 호텔용 수건들을 차곡차곡 쌓아놓았는데, 작업실에 적응을 하는 동안은 샤워를 하지 않았으므로 위칸에 있는 수건을 쓰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드디어 위칸에 있는 수건을 쓰던 그날, 나는 그보다 더 위칸인 가장 위칸에 검은 봉투가 삐져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 저건 또 무엇인가. 나는 봉투에 손을 뻗었다가 말았다. 왠지 그 봉투에는 손을 대기가 쉽지 않았다. 봉투 바깥을 만질 용기도 없었다.


입주한 후로 작업실에는 많은 지인들이 방문했으므로 지인에게 대신 꺼내 달라고 부탁하거나 아니면 내가 용기 내어 꺼내는 동안 옆에 있어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굳이 그 봉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실 봉투를 열어보지 않고 위 손잡이만 잡아 쓰레기통에 버리기만 하면 되는데, 남의 물건을 함부로 버리기도 찝찝하고, 무엇인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 돌려드리겠다고 말하기도 이상했다(굳이 전화까지 할 만한 물건일까?). 생활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대로 두는 내 이상한 성격은 그 후로 오랫동안 내 삶의 한 부분으로 달고 살고 있다.


 검은 봉투를 언제 처리하게 될까?  작업실을 쓰는 내내  흔적 이외의 흔적이 계속 따라다닐 거라 생각하니 그것 또한 찝찝하다. 나는 예민한 사람일까, 무딘 사람일까.  작업실에서 나갈 때는  물건들을  챙겨나가야겠다. 검은 봉투는 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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