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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Feb 27. 2021

이름을 바꾸면 뭐가 좀 달라졌을까

영화 <어바웃레이>의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개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각 반에 '수진이'가 2~3명씩은 꼭 있었을 정도로 그 시대에 가장 흔하디 흔한 이름이 수진. 어떤 친구가 "수진아!"하고 부르면 김수진, 이수진, 유수진이 같이 뒤를 돌아보며 머쓱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만약 이름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으로 바꿀까 고심하다가 '다홍'이라는 이름이 문득 떠올랐다. 대단한 뜻은 없고, 친구 이름 중에 '보라'가 있는데 그 아이만의 색깔처럼 느껴져 부러웠다. 색깔 이름을 가질 수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색이자 부르기에도 정감이 가는 다홍이가 안성맞춤이었다(사람들은 모두 촌스럽다고 했지만).


그러나 나는 여전히 유수진이라고 불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 당시 이름을 바꾸지 않았으니까. 개명하고 싶다고 엄마에게 징징 졸라대긴 했지만 진짜로 엄마가 나의 손을 잡고 동사무소를 데려갔어도 아마 이름을 바꿀 깡은 없었을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이름을 바꾸는 건 무 자르듯 단번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가수 이소라님의 노랫말처럼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리며 살아가면서, 이미 선택된 것들을 스스로 바꾸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나의 이름처럼, 인생은 나의 선택 여부와 상관없이 흘러가곤 한다. 영화 <어바웃레이>에서 레이는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남성의 성 정체성을 갖고 태어난 아이다. 성전환을 위해 호르몬 요법을 받기로 결심하는데, 아직 미성년자라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 싱글맘인 레이의 엄마는 친부의 동의를 받기 위해 남편을 찾아 나서지만 사실은 그녀도 동의서에 사인하기를 망설이고 있다. 레이가 지금은 완강하게 마음을 먹고 있더라도 성인이 된 후엔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동의서 문제로 말다툼을 하고 있는 레이와 레이의 엄마


레이가 바꾸려고 하는 것이 성별이 아닌,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그 무언가라는 측면으로 보면 어떨까. 내가 한때 그렇게나 바꾸고 싶었던 이름이 될 수도 있고, 외모와 같은 겉모습일 수도 있고, 국적이 될 수도 있다. 레이는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에게 맞는 방향으로 태어나진 않았어도, 위에서 언급한 노랫말의 이어지는 가사처럼 '걷고 말하고 배우고 난 후로 난 좀 변했고, 나대로 가고 멈추고 풀'면서 자신의 삶을 바꾸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진 사람일 뿐이다.


만약 그때 내가 다홍이라고 이름을 바꿨다면 후회했을까. 글쎄, 바꿔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다만, 몇몇 사람들에게 다홍이라고 불리는 것 외에 크게 바뀌는 건 없었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다홍색을 좋아하고, 걱정이 많은 신중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면서도 웃을 때는 호탕하게 웃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수진이로 불리든 다홍이로 불리든 나는 주변 사람들이 알고 지내던 그 사람, 그대로였을 것. 어쩌면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나는 것들이 겉으로는 많은 것들을 규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본질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한다.


머리를 기르고, 치마를 입고, 체육 시간에는 피구를 하며 살아온 나도, 가끔씩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더 잘 어울렸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종종 머리를 짧게 자르고 싶은 충동이 들었고, 치마를 입을 때마다 나와는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았고, 피구공에 맞아 아플까 봐 조심조심하는 것보다는 남자아이들과 같이 거칠게 어깨를 부딪치며 축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으니까 말이다. 겉으로는 내가 여자처럼 보여도, 본질은 남자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그녀' 혹은 '그'라고 표현하지 않으려고 했다. 레이가 어떤 선택을 하든 레이를 레이 그 자체로, 수진이든 다홍이든 나는 나 그 자체로, 본질을 바라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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