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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Feb 16. 2021

올해도 영어를 짐으로 가져갈 텐가

나의 첫 영어는 일곱 살 무렵 한 피아노 학원에서 시작되었다. 피아노를 배우던 학원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과 영어를 모두 배웠다. 당시 어떻게 영어를 공부했는지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게임이 있다. 출제자가 영어 단어 하나를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칠판에 그 영어 단어의 알파벳 수만큼 밑줄을 긋는다. 그 옆에 심판대에 올라간 졸라맨을 그린 뒤, 친구들이 스무고개 하듯 알파벳을 하나하나 부를 때마다 본인이 생각한 영어 단어 속에 있는 알파벳과 부합하면 밑줄에 그 알파벳을 쓰고, 없으면 졸라맨의 몸을 팔, 다리, 몸통, 머리를 분리해서 하나씩 지워나가는 게임이다. 졸라맨의 몸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면 출제자가 이기는 이 잔인한 게임을 우리는 '헝거게임'이라고 불렀고, 일곱 살의 나는 그 게임을 하자고 선생님을 졸랐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로 약 20년 넘게 영어 공부를 달고 살아왔다. 학교에서도 배우고, 학원에서도 배우고, 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혼자 도서관에서 토익이나 오픽, 토익스피킹 시험공부를 했다. 이렇게나 공부를 시키는 걸 보면 영어가 중요한 것 같기는 한데, 딱히 지금 당장 영어 못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라 죽어라 영어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20년 넘게 공부를 했어도 내 영어 실력은 늘 고만고만한 상태였고, 어쩌다 몇 년에 한 번 외국인 앞에서 영어를 쓸 일이 생기면 입 한 번 떼지 못하고 저 멀리 외국인이 떠난 뒤에야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보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여전히 내 일상에서 당장 영어가 필요한 일은 없지만 올해는 영어라는 놈을 깨부수고 싶었다. 영어 공부는 연초 버킷리스트에 흔히 등장하는 단골이긴 하나 버킷리스트에 '영어 공부'를 적는 이번의 마음가짐은 조금 달랐다. 인생에서 이만큼 질질 끌었으면 한 번은 부러뜨려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 반, 미국에서 창업해 멋진 커리어를 쌓고 계신 인생 멘토님과 프리토킹을 해보고 싶다는 기대 반이었다. 연초부터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지난해 연말쯤부터 급히 영어 교육 정보란 정보는 다 뜯어보기 시작했다. 강남역까지 오프라인으로 학원을 가야 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았고, 전화 영어를 몇 번 테스트해보니 통화상으로는 한국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 나에겐 역부족일 것 같았다. 영어 선생님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앱도 있던데, 문장을 만드는 시간에 더해 영어 타자가 느려서 상대방과 몇 마디 주고받지 못하는 게 답답했다.  


그렇게 이것저것 써보다 게이미피케이션을 접목한 한 영어교육 앱을 발견했다. 이것도 며칠 써보다 말겠지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했건만 시간이 갈수록 달력에 찍히는 출석 도장이 신경 쓰여서 매일 출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20 문제만 풀어야지, 하고 들어갔다가 100 문제도 넘게 푸는 내 모습을 보면서 일곱 살에 피아노 학원에서 하던 헝거 게임이 생각났다. 이 앱에서도 헝거 게임과 비슷하게 빈칸을 채우는 형식으로 퀴즈를 풀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넷째 주부터 시작했으니 어느덧 두 달을 채워간다. 영어 공부에 마음 붙이기가 이렇게 쉬운 것이었던가. 빈칸과 나에게 잘 맞는 앱 하나만 있으면 되는 이 간단한 것을 20년 넘도록 씨름해온 것인가.


'말해보카' 앱 출석 체크 화면. 반신반의하며 시작했던 12월이 지나자 출석률이 높아진다


한 달 이상 꾸준히 영어를 공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높은 시험 점수보다 언젠가 누군가와 프리토킹을 하고 싶다는 기대감이 나를 더 강하게 자극시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나에게 맞는 이 방법을 찾아오기까지 멀리 돌고 돌아왔지만 그 모든 시도들이 있었기에 어떤 방법이 더 잘 맞는지도 알게 됐다고 생각한다. 몇 달 뒤, 이 방법도 지루해져 또 다른 새로운 방법을 찾아가야 할지도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해보지 않고 알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산다는 건,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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