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 너도나도 트렌치코트를 꺼내 입는다. 특히 출퇴근을 하는 지하철에서 내 앞사람도 트렌치코트, 뒷사람도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으면 백화점의 마네킹이 된 것 같아 당황스럽다. 아무래도 트렌치코트는 어디에 걸쳐도 패션 테러리스트는 면할 수 있는 무난한 옷이기 때문에 바쁜 직장인들의 교복이 되어버린 듯하다.
회사원은 트렌치코트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입고, 키가 크든 작든 다양한 신체에도 무난하게 어울리며, 어떤 옷과도 매칭이 쉬운 평범한 옷이니까. 출근을 1분 여 앞두고 트렌치코트를 입을까, 노란색 트위드 재킷을 입을까, 고심을 하다가 결국 트렌치코트를 꺼내 든 적이 많다. 왠지 화려하고 비교적 덜 평범한 옷은 회사에 가는 평일에 입기엔 좀 튀는 것 같아서.
작년에 글쓰기 모임에 나가 보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회사원이었다. 모임 첫날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는데,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미주알고주알 너무 자세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 일 수도 있지만, 보통 자신을 '회사에 다니는 사람'으로 소개했다. 어떤 산업군에 있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자세하게 알 수는 없어도 '회사원'이라는 단어 하나만 듣고 나는 어쩌면 나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섣부른 판단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격주 주말마다 모임을 이어가면서 풀린 긴장만큼 조금씩 그들의 이야기를 더 깊이 들을 수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선택하게 된 이유나 만족도, 평범해 보이는 그 일을 하게 되기까지의 평범하지 않았던 과정과 앞으로의 목표 같은 것들까지도. 처음부터 그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경우도 있었고, 아주 우연한 기회로 시작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이야기엔 높낮이가 다른 우여곡절이 담겨 있었다. 회사 이름이나 직무만 들었더라면 몰랐을, 네모난 명함 밖의 비슷하지 않은 이야기들.
나는 원래 마케터가 아니었다.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면 갈 수 있는 곳이 미디어 업계나 출판 업계뿐이라고 생각했고, 대학 내내 방송 작가가 되겠다고 떠들다가 결국 방송국에 들어갔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했으니 얼마나 무난하고 평범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겠는가. 그런데 나는 한 달 만에 엉엉 울며 3년 간의 꿈을 접었다. 가장 친한 대학 친구는 현재까지도 방송 작가로 일하고 있을 만큼 그 일이 잘 맞아 보였지만, 나에게는 하나도 평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 뒤로는 출판 업계에 발을 들였지만 그곳에서도 1년 만에 나왔다. 그때는 내가 가진 두 가지의 선택지를 모두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남들이 겪어보지 못한 특이한 이력으로, 나에게 맞는 지금의 새 트렌치코트를 찾게 된 것이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에서, 이야기 속 인물의 캐릭터를 창조하는 '성격 창조 워크숍'을 진행하면 학생들이 대부분 모호한 인물을 만들어온다고 했다. 학생들에게 창조한 인물에 대해 물으면, '그냥 평범한 회사원(대학생, 공무원 등)이에요.'라고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김영하 작가가 선생으로서 해주는 대답은 이것이다. "평범한 회사원? 그런 인물은 없어." 그러고 보면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평범한 회사원은 무시무시한 반전의 캐릭터이거나 독특한 사연을 가진 인물일 가능성이 높지 않던가.
내가 창조하고 싶은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 내가 만들어가고 있는 회사원으로서의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평범한 옷을 입었다고 해서 그 사람까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듯, 평범한 트렌치코트는 있어도 평범한 회사원이라는 것은 없다. 매일 똑같은 검은색 목폴라를 입었던 스티브 잡스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듯이, 내가 지금 입고 있는 평범한 트렌치코트 속에도 나만의 특별함이 가려져 있을 것이다. 평범한 회사원? 그런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