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생일 전전날, 친구에게 무엇이 갖고 싶냐고 물었다. 예전에는 갖고 싶은 선물을 말하라고 하면 어떻게 내 입으로 갖고 싶은 선물을 말하냐고 했지만, 오랜 친구 사이엔 브랜드명과 상품명을 정확하게, 가급적 빨리 말해주는 게 더 낫다. 친구는 내가 작년에 사주었던 러쉬 팩이 피부에 잘 맞았는지 그것을 또 사달라고 했다(고맙다, 고민 안 하게 해줘서).바로 백화점으로 향해 러쉬 팩과 립밤을 들고 계산대로 가서 선물 포장을 부탁드렸다.
"포장비는 7,000원입니다"
네? 7,000원이요? 작년에는 온라인으로 구입해 택배로 보냈기 때문에 딱히 선물 포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직접 만나서 선물을 줄 거라 예쁘게 포장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7,000원이라니. 러쉬는 환경 보호 차원에서 선물 포장을 할 때 '낫랩'이라고 부르는 보자기 포장을 해준다고 했다. 음, 그래. 7,000원의 값어치를 할 만큼 고급스럽기는 했다. 색조 화장품이나 얼굴에 바르는 제품은 상대방에게 맞지 않을까 봐 염려스러운 부분이 많은데, 러쉬는 주로 바디 제품이 많고 가격도 합리적이라 ‘선물 브랜드’로 자주 찾는다. 아마도 러쉬는 이러한 니즈를 겨냥해 특별한 보자기를 준비했을 것이고.
직원 분께 신용카드를 건네는 찰나의 시간 동안 극심한 고민에 빠졌다. 선물 포장을 하지 않으면 누런 러쉬 종이백에 상품만 담길 것이고, 7,000원을 더 내면 예쁘고 고급스러운 보자기에 한 번 더 곱게 싸일 것이다. 자고로 선물은 내용이 중요하다며 손편지만 써줘도 좋다는 말은 어쩌면 옛 구시대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손편지도 봉투는 필요한 법. 내가 이 선물을 받는다고 생각해보면 누런 러쉬 종이백에 담긴 선물도 감지덕지겠지만, 영롱한 보자기에 싸인 무언가를 받았을 때 행복감이 훨씬 더 클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냥 종이백에 넣어주세요"
그러나 나는 결국 포장을 포기했다. 고작해야 3~4만 원어치의 내용물을 7,000원짜리 보자기로 싸맨다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지경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친구를 만나 선물을 건네는 순간, 조금 후회를 했다.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이미 친구가 알고 있었으니 내용물에 대한 기대는 없었겠지만, 선물을 보자기에 쌌더라면 이 선물을 받는 그 순간만큼은 색다른 행복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말이다(물론 친구는 누런 러쉬 종이백을 받으면서도 돌고래 소리를 내며 좋아해 주었지만).
생일 선물은 내용이 중요할까, 포장이 중요할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50대 50이다. 백화점에서 가격에 맞춰 산 물건보다는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할까 고심하며 고른 선물이야말로 정성이 담겨 있다. 마찬가지로, 집에서 굴러다니던 찌그러진 종이백에 헐렁하게 담긴 선물보다 예쁜 포장지에 꽁꽁 싸인 선물이 훨씬 기대감을 높여준다. 내용물과 포장을 함께 고려한다면 유용성과 감동,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내용물도, 포장도 별로인데 좋은 선물도 있다. 약 20년 가까운 우정을 쌓는 동안 매번 내 생일을 잊어버리고, 당연히 선물도 미리 준비를 하지 않는 진선이는 그 해에도 내 생일파티 약속 시간에 늦었다. 저 멀리서 무언가를 달랑달랑 들고 달려오는 진선이를 보며 이제는 실망감보다는 '역시 진선이'라고 생각했다. 진선이가 들고 온 검정 봉투 속에는 무민이 그려진 슬리퍼가 있었다. 약속 시간에는 늦었고, 무언가를 사긴 사야 하는데 오는 길에 들를 수 있는 곳이 문방구뿐이었던 것이다. 서른이 넘은 내가, 과연 어떤 친구에게 검정 봉투에 담긴 무민 슬리퍼를 선물로 받아보겠는가. 무민 슬리퍼를 들고 달려오는 게 귀여워서였을까. 나는 그 선물이 참 좋았다. 의외로 내 취향이 무민 슬리퍼이기도 했고.
또, 포장 때문에 김이 빠지는 경우도 있다. 회사에서 연말 파티로 '집에서 안 쓰는 물건'을 포장해 사람들과 교환하는 행사를 한 적이 있다. 포장지에 싸여있어 어떤 물건인지는 알 수 없지만, 허리까지 닿는 큰 박스도 있고 손바닥에 들어오는 아주 작은 박스도 있어, 살벌한(?) 눈치 게임이 묘미인 행사다. 내 눈에는 유명 주얼리 브랜드 포장지에 싸인 한 작은 박스가 들어왔고 한껏 기대에 차 뚜껑을 열었는데, 그 브랜드의 귀걸이도 아닌, 귀에 걸기도 좀 애매한, 이상한 디자인의 귀걸이가 담겨 있었다. 그 선물을 준비한 사람은 날 속인 게 즐거운지 깔깔깔 웃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것도 깜짝 서프라이즈라면 서프라이즈이니 좋은 선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뚜껑을 열어보는 짧은 순간의 두근거림, 예상치 못했던 무언가를 봤을 때의 놀라움, 연말 행사를 통해서나마 그런 희귀한 경험을 해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잊지 못할 선물이었다. 결국, 내용물이 무엇이든 간에 포장이 보자기든 아니든 간에, 주는 사람도 즐겁고 받는 사람도 즐거운 경험이 된다면 선물은 다 좋은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