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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Jun 16. 2021

요즘 십 대가 어른보다 글을 잘 쓰는 이유

"글을 쓰면서 걱정된 적 없어요?"

"아니요? 그냥 쓰면 되죠!"


잘못짚었다. 지난 주말에 권선 청소년수련관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말이다. 6월 초부터 날씨는 한여름처럼 푹푹 쪘고, 초행길에 길을 헤매다 나름 예쁘게 차려입고 간 옷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수련관에서는 화상으로 수업을 할 수 있는 방을 마련해주셨고, 나는 그 방에 혼자 앉아 카메라를 켜놓고 바짝 입술에 힘을 준 채 아이들이 수업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아이들이 참여하는 수업. 아이들이  명씩 입장할 때마다 나는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어떤 톤으로 이야기를 해야 아이들이  집중할  있을지 고민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 아무리 아이들의 시선에 맞춰 생각해보려 해도 부족함이 많을 터였다. 아이들이 내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던지거나(선생님, 제가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그것을 에세이로 만들면 에세이인가요?), 내가 하는 이야기에 반대되는 의견을 던질 ( 처음에 언급한 대화 내용)마다 나는 컴퓨터 화면 너머에서 진땀을 흘렸다.


공개적인 글을 쓸 때 나는 독자의 눈치를 많이 본다. 회사에서 PR 업무를 했다 보니 그런 성향이 더 강해졌을지도. 토씨 하나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보니 한 문장 한 문장마다 눈치를 보며 글을 쓴다. 하지만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독자를 향한 글은 독자의 시선을 배제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20명의 아이들에게 '네가 좋아하는 것을 소개하는 글을 써보라'라고 사전 과제를 내주고, 제출받은 파일을 열어보는 순간, 눈치보기 바쁜 나의 표현력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살면서 아이들의 글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던 나는 후회가 됐다. 내가 배워야 할 것은 여기에 있었구나, 싶어서.


저의 취미를 소개합니다. 저는 하늘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하늘을 보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이 취미의 장점은 일상에서 힘들거나 일이 잘 안 풀리고 있을 때 창밖에 있는 하늘을 보면 고민거리가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아침에 해가 뜨는 하늘, 맑고 화창한 하늘, 붉은색의 노을이 지는 하늘, 소나기가 내리는 하늘 등 아름다운 하늘을 보는 취미가 있습니다. 저는 노을이 지는 하늘을 좋아합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창밖을 쳐다볼 때 서쪽에는 해가 지고 동쪽에는 별이 보이고 빨간색, 분홍색, 파란색이 섞여 아름다운 하늘 보면 힘들다는 생각이 없어지기 때문에 저는 노을이 지는 하늘을 좋아합니다. - 김도담(중학교 1학년)


바쁜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도담이가 눈에 그려졌다. 사실 도담이는 내가 수업을 하기 전, 다른 수업에 먼저 참관을 했다가 얼굴을 기억해두었던 학생이었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이라도 미리 기억해두려는 습관이 있는데, 그 아이가 도담이었다. 그래서 이 글을 읽을 때 도담이의 얼굴이 겹쳐 떠오르면서, 예쁜 것을 예쁘게 보고 예쁘게 그려낼 줄 아는 아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왜인지 나는 노을 지는 하늘을 보면 청승맞게 마음이 아리던데, 도담이에게 노을 지는 하늘은 지친 하루를 안아주는 하늘이었나 보다. 같은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이렇게나 다른 마음이 있다. 어제는 노을 지는 하늘을 보는데, 도담이의 글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토토는 곁에 있으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아침에 토토가 먼저 일어나서 제 침대에 와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저의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생략) 물론 토토를 집에 데려오면서 모두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엔 배변 훈련을 잘하지 못하여서 바닥이 상한 적도 있었고, 이빨이 자라나던 시기에 제가 보던 책들을 물어뜯은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겪어가면서 시간이 지나가니까 토토를 더 능숙하게 다룰 줄 알게 되었고, 같이 성장해 나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단지 귀여워서 데려왔던 반려견이, 이제는 같이 성장해 나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정말 제 인생의 반을 책임진 저의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된 것입니다. - 이하은 (초등학교 6학년)


하은이는 반려견 토토를 소개했다. 글의 앞부분을 읽으며 토토가 얼마나 귀엽고, 즐거움을 주는 존재인지에 푹 빠져 있던 나는 뒷부분으로 갈수록 진지해졌다. 하은이는 반려견과 함께 사는 것이 단순히 즐겁기만 한 일이 아니라고 썼다. 나 역시 어렸을 때부터 강아지를 좋아해서 엄마에게 강아지를 키우자고 졸랐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똥은?"이라는 대답만 했다. 반려견뿐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족이 되고, 그 존재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즐거움을 넘어 많은 부분을 끌어안을 준비가 필요하다. 하은이가 귀여운 토토와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토토의 실수들을 끌어안아주고 그 과정을 함께 이겨내 왔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 짧은 글을 통해 하은이가 하고 싶었던 말도 아마 그것이었으리라.


집에 도착했을 시간이다. 그때 내가 버스를 탔다면 말이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날이 좋아서 근처 의자에 앉아 모퉁이에 자라난 풀처럼 광합성을 하고 있었다. 슬금슬금 바람이 나한테 오는데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서 노래를 하나 틀었다. 바로 태연의 'I'라는 곡이다. (생략) 그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세상 가득 채울 만큼 나를 펼쳐가'이다. 나라는 사람을 세상에 가득 채우려면 얼마나 큰 노력을 해야 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해보고 싶다. 세상에 나를 채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본 결과, 업적을 세우는 것보다는 나 자신을 잘 알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박유미 (고등학교 3학년)


유미는 이 수업에서 가장 고학년인 고등학교 3학년이다. 유미는 인상 깊게 들은 곡의 가사를 통해 중요한 가치를 깨닫게 된 듯하다. 나도 1,20대엔 세상에 나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고, 내가 가진 것들을 펼쳐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하는 건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유미가 말한 대로, 어쩌면 남들이 보기에 그럴싸한 업적을 세우는 것보다 나 자신을 먼저 잘 알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 유미는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채우기 위해 급급했던 나보다 훨씬 먼저, 이 생각을 하며 세상에 자신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평소 순수하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 않지만 20명의 아이들이 제출한 글의 한 가지 공통점을 꼽자면, 순수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을 담은 이 글에는 작은 티끌 그 무엇도 섞여있지가 않다. 상쾌하고 맑다. 왜 나는 아이들이 글을 쓰면서 걱정을 했을 거라는 생각부터 미루어 짐작했는지. 요즘 십 대는 서른이 넘은 나보다 걱정 없이, 글을 잘 쓴다.


권선청소년수련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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