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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die Feb 04. 2021

공사장에서 배운 삶의 지혜

단상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나는 주말 혹은 방학을 이용해 공사장에 나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속된 말로 '노가다'를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고등학생인 내가 돈을 벌어야 할 정도로 우리 집이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남들보다 넉넉지 않은 우리 집 경제사정은 얼핏 알고 있었기에 어린 마음에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루를 일하고 나면 약 5~6만 원의 일당을 받았다. 그때 당시 고등학생인 내게 엄청나게 큰 액수였다. 그 돈을 모아 소풍 때 입을 '리바이스 엔진' 청바지를 사기도 했고, 뒤늦게 불붙은 학구열 때문에 소요되는 학원비나 문제집을 사는데 보태기도 하였다.


이른 새벽 집을 나서서 인력사무소 안으로 들어가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적게는 30대, 많게는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한 겨울, 주전자가 놓여있는 작은 난로가 전부인 인력사무소 내부는 이른 새벽부터 모여든 사람들의 입김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사무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한 사람이 문을 힘차게 열고 사무실로 들어온다. 인력 사무소장이었다. 소장은 낡은 책상에 앉아 한 손엔 담배를 들고 한 손으로는 종이컵에 담긴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줄 서 있는 사람들에게 일을 배정해주기 시작했다. 소장과 안면이 있거나 특별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1순위였다. 그 이후는 선착순, 혹은 외모를 보고 소장이 결정했다. 모든 것은 소장 마음이었다. 일을 배정받고 난 뒤에는 개인별로, 혹은 그룹별로 뿔뿔이 일터로 흩어졌다.


누가 봐도 고등학생인 나는 처음부터 일을 배정받을 수 없었다. 그런 날을 이곳 사람들은 '데마찌'라고 불렀다. 그것이 일본어인 것은 느낌적으로 알았지만 정확한 뜻은 몰랐다. 나중에 알아보니 "일이 없어서 대기한다"는 의미를 가진 일본어였다. 어쨌든 수차례 도전한 끝에 나도 일을 배정받을 수 있었다. 나같이 특별한 기술이 없는 초보자에게는 '잡부' 혹은 '시다바리'라는 명칭이 주어졌다. 나 같은 사람이 하는 일은 정말 간단한 일이었다. 공사가 다 끝난 현장에 쌓인 먼지나 모래들을 빗자루로 끊임없이 쓸어내거나, 아니면 기술을 가진 '사수'가 그저 시키는 대로 보조를 하면 되었다. 하루 종일 먼지를 쓸고 온 날 집에 가서 코를 풀면 시커먼 콧물이 나왔지만, 그때는 그저 내가 돈을 스스로 벌 수 있어서 좋았다.  


참 많은 곳을 다녔던 것 같다. 부산 화력발전소, 부산-울산 고속도로 공사현장, 부산동중, 지하철 수영역 공사현장, 이름 모를 부산의 아파트 공사현장 등등. 현장은 전형적인 부산 남자들의 투박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현장에서 자주 쓰이는 은어를 못 알아들어 수없이 욕을 먹고, 혼나기 일쑤였다. 돌이켜 보면 실수가 생명의 위협으로 직결될 수도 있는 곳이었기에 더더욱 정신을 차리라고 동료 아저씨들이 엄하게 대하셨던 것 같다. 대부분의 일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 노동의 대가는 달콤했다. 돌이켜 보면 정말 값진 인생의 경험이었다. 이런 일을 했던 사람들은 자기가 일했던 현장을 지날 때면 우스개 소리로 자기가 다 지었다고 이야기를 하곤 한다. 나 또한 부산-울산 고속도로를 운전하며, 부산의 수영 지하철역을 지나며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일화가 하나 있다. 비가 와서 대부분 사람들이 '데마찌'를 당한 날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른 아침부터 약간 취기가 있었던 아저씨 한 명이 소장과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대충 엿들어보니 아마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것 같았다. 그때 인력 사무소장이 그 아저씨를 조용히 타이르며 한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소장은 투박한 특유의 부산 사투리로 개구리가 점프를 하려면 몸을 움츠려야 하는데, 당신은 개구리처럼 더 높은 도약을 위해서 지금 잠시 움츠리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지금 절대 포기하면 안 되니까 술 좀 끊고 열심히 살라며 아저씨를 타이르는 것이었다. 정말 개구리가 점프하기 전에 자신의 몸을 움츠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그 말을 듣고 나니 매일 현금이 가득 든 일수가방을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던 전형적인 악덕 사장(?) 이미지의 사무소장이 세상 인자한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인력 사무소장의 말처럼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몸을 움츠리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움츠림'의 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도약을 위한 소중한 기회로 받아들이고, 움츠린 순간 도약해야 할 목표를 정확히 바라본다면 정확하면서도 강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에 대한 해답은 자신이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어느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각자 인생의 '움츠린' 순간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한 전례 없는 팬데믹 상황에서 어렵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혹자는 앞으로 역사가 BC(Before Covid19), AC(After Covid19)로 구분될 것이라고도 이야기한다. 그만큼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의 강력한 영향력은 우리의 일상을 더더욱 '움츠리게' 만들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전례 없는 위기 속에서도 좌절하고, 눈물 흘리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이 위기를 기회 삼아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를, 혹은 이미 도약을 해서 먼 곳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싸이월드에서나 보일 법한 "포기란 배추를 셀 때나 쓰는 것이다."라는 지극히 상투적이고 출처 불분명한 이 문장처럼,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절대,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도 말했었다. Never give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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