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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수 비에이티 Jan 25. 2020

<사랑의 기술>에서 말하는 "살아가는 기술"

완벽한 해방이 아닌, 조금은 덜 흔들리기 위한 에리히 프롬의 조언


실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나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다루기 어렵다기 보다는 어딘가 모호하고, 뭉뚝하고, 무엇에 대한 문제인지는 느껴지지만 명확하게 어떤 문제인지 정의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실존의 문제가 "나는 왜 살아가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애초에 "이렇기 때문에 살아간다"는 답을 내릴 수 없기도 하며, 약간의 오기나 억지를 부려가며 답을 찾으려고 할 때 왠지 모르게 숭고함을 찾는 쪽으로 흘러가 버리고 길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한다는 종교적 대의를 추구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겠다는 가장 세속적이지 않아 보이는 세속적인 대의를 추구함으로써, 행복한 가정을 꾸려서 좋은 가장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짐으로써 그러했다. 어떤 식으로든 나름의 "숭고함"을 찾지 않고서는 나에게 끊임없이 던져지는 실존의 문제에서 해방될 수 없었다. 어쩌면 서구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폭력성을 가진 한국 사회에 최적화 된 사람으로써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아무래도 번잡한 일 이었을 것이다.


사랑만이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건전하고 만족스러운 대답이라면, 상대적으로나마 사랑의 발달을 배제하는 사회는 인간성의 기본적 필연성과 모순을 일으킴으로써 결국 멸망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의 기술>에서는 여러가지 불완전한 사랑의 형태를 보여주고, "자기 자신에게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 스스로를 사랑하고, 타인의 가능성을 실현하는데 온전한 관심을 갖고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그녀를 사랑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세계와 합일하려는 시도"를 완전한 사랑의 형태로 제시한다. 이러한 시도가 실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이것이었다. 깊은 선정에 들어 나-타자-세계와의 경계를 없앤 상태가 되고, 선정에서 빠져나오더라도 그 경험을 바탕으로 보편선(善)을 실현하는데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이야기와 비슷하게 보였다. 다소 놀라웠던 점은 에리히 프롬은 이것을 이론적으로만 주장하지 않고, 그의 노년의 삶 대부분을 "사랑을 표현하는 욕구를 달성"하는데 할애했다는 것이다.


나, 타자, 세계, 가능성, 합일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논리에 집중하다 보면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나를 돌봄으로써 나의 욕망을 깊게 들여다보는 시도를 하고 타인의 욕망을 관찰하고 그/그녀의 가능성을 함께 발현해 갈 수 있는 출발점은 결국 "성찰적 관점, 관심과 대화"인 것 같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통한 합일"을 실존 문제의 해답으로 제시하지만, 합일을 위한 끊임없는 시도로도 충족되지 않는 공복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그렇듯 합일의 단계는 일시적이고 합일을 위한 노력은 지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합일의 상태"에 도달하려고 하기 보다, 도달하기 위한 행위의 하나로서 "사랑"을 인지하고 다른 여러 조건들과의 동적 평형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여긴다면 조금은 덜 흔들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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