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경전으로 만들다
통일은 질문의 필요성을 약화시킨다
기원전 221년,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황제가 하나의 제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진시황이었다.
그가 첫 번째로 한 일들을 나열해 보면, 통일이란 것이 질문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선명해진다. 그는 문자를 통일했다. 도량형을 통일했다. 도로의 폭을 통일했다. 수레바퀴 사이의 간격까지 통일했다. 그리고 사상도 통일하려 했다. 분서갱유. 법가 이외의 책을 태우고, 유가 학자들을 생매장한 사건이다. 춘추전국시대의 백가쟁명, 그 수백 년에 걸친 질문의 시장을 물리적으로 폐쇄한 것이다.
진나라는 15년 만에 무너졌다. 너무 가혹했다. 하지만 진시황이 제기한 근본적인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거대한 통일 제국을 다스리려면, 하나의 이념이 필요하지 않은가? 수백 개의 학파가 제각각 다른 말을 하는 상태로는 제국을 운영할 수 없지 않은가? 진시황은 그 답을 법과 폭력에서 찾았고, 실패했다. 다음 제국은 더 영리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기원전 202년, 유방이라는 농민 출신의 인물이 한(漢)나라를 세웠다.
유방은 지식인이 아니었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유학자가 유방에게 시경과 서경의 가르침을 들먹이자, 유방이 그 유학자의 관모를 벗겨 그 안에 오줌을 누었다는 이야기다. 과장이겠지만, 초기 한나라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전쟁으로 천하를 얻은 사람들에게, 책 속의 질문은 한가한 소리로 들렸다.
초기 한나라는 황로학(黃老學)이라 불리는 도가적 통치를 택했다. 무위(無爲), 즉 가능한 한 간섭하지 않는 통치였다. 진나라가 너무 많이 간섭해서 망했으니, 그 반대로 가겠다는 것이다. 세금을 낮추고, 법률을 완화하고, 백성을 쉬게 했다. 이것은 효과가 있었다. 한나라 초기 수십 년 동안 경제가 회복되었고, 인구가 늘었으며, 사회가 안정되었다.
하지만 60여 년이 지나자, 새로운 문제가 떠올랐다. 제국이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통치'로는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 생겨났다. 변방의 흉노족이 끊임없이 침입했다. 제후왕들이 중앙의 권위에 도전했다. 사회 질서가 흔들렸다. 제국에는 좀 더 적극적인 통치 이념이 필요했다. 하지만 진나라처럼 가혹한 법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 사이 어딘가에 답이 있어야 했다.
이 질문을 붙잡은 것이 한 무제(재위 기원전 141~87년)였다. 열여섯 살에 즉위한 이 야심 찬 황제는, 제국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도 강력하게 만들 수 있는 이념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동중서(董仲舒)라는 학자가 나타났다.
동중서(기원전 179~104년경)는 한 무제에게 세 차례 상소를 올렸다. '천인삼책(天人三策)'이라 불리는 이 상소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 유교를 국가의 공식 이념으로 삼아야 한다. 다른 사상은 배척해야 한다. "제가 어리석은 소견으로 생각하건대, 육예(六藝)의 과목과 공자의 도에 속하지 않는 것은 모두 그 길을 끊어야 합니다. 사설(邪說)이 사라진 뒤에야 통치의 도가 하나로 될 수 있고, 법도가 밝아지며 백성이 따를 바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훗날 '독존유술(獨尊儒術)', 오직 유교만을 존중한다는 정책으로 정착되었다.
둘째, 하늘(天)과 인간(人)은 서로 감응한다. 황제는 하늘의 뜻을 받들어 통치한다. 황제가 도덕적으로 통치하면 하늘이 상서로운 징조를 내리고, 황제가 잘못하면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 이것이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었다.
이 논리는 교묘했다. 한편으로는 황제의 권위를 하늘에 연결시켜 절대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에게 도덕적 책임을 지웠다. 황제는 하늘의 대리인이니 절대 권력을 가지지만, 도덕적으로 통치해야 하니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유학자들은 하늘의 뜻을 해석하는 사람으로서 황제를 견제할 수 있었다. 법가의 노골적인 권력 숭배도 아니고, 도가의 무관심한 방임도 아닌, 그 사이의 정교한 타협이었다.
한 무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춘추전국시대에 수십 개의 학파가 경쟁하던 지적 시장은 공식적으로 하나의 사상으로 수렴되었다. 유교가 국가 이념이 된 것이다.
잠시 멈추어 이 순간의 무게를 느껴보자. 이것은 단순한 정책 결정이 아니었다. 이 결정 이후 2,000년 동안, 동아시아의 지식 세계는 유교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 작동하게 된다. 물론 도가와 불교도 살아남았고, 시대에 따라 영향력이 커지기도 했다. 하지만 교육의 공식적 골격, 관료 선발의 기준, 통치의 공식 언어는 언제나 유교였다. 한 무제와 동중서의 결정은 교육의 역사에서 되돌리기 어려운 분기점이었다.
다음 단계는 자연스러웠다. 유교가 국가 이념이 되었으니, 유교를 가르칠 기관이 필요했다.
기원전 124년, 한 무제는 태학(太學)을 설립했다. 중국 최초의 국립대학이었다. 처음에는 박사(博士) 5명과 제자 50명으로 시작했다. 각 박사는 오경(五經)―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중 하나를 전담했다. 학생들은 한 명의 박사 밑에서 하나의 경전을 배웠다. 과정을 마치고 시험에 통과하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태학의 규모는 빠르게 팽창했다. 한 무제 시기에 50명이던 학생이, 서기 2세기에는 3만 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3만 명. 이것은 고대 세계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규모다. 아테네의 아카데미나 알렉산드리아의 뮤세이온은 수십 명에서 수백 명 수준이었다.
하지만 태학에서 가르친 것은 아카데미나 뮤세이온에서 가르친 것과 결정적으로 달랐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토론했다. 답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의 뮤세이온에서 학자들은 지구의 둘레를 재고, 별의 위치를 기록했다. 자연이라는 텍스트를 새롭게 읽어내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태학에서 학생들은 이미 정해진 텍스트―오경―를 이미 인정된 방식으로 해석하는 법을 배웠다. 질문의 방향이 바깥이 아니라 안쪽으로, 세계가 아니라 텍스트로 향해 있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보자. 태학의 어느 강의실을 상상해 보라. 박사가 앞에 앉아 있고, 수십 명의 학생이 둘러앉아 있다. 박사가 춘추의 한 구절을 읽는다. "은공(隱公) 원년, 봄, 왕의 정월(元年春王正月)." 이 짧은 구절 하나에도 해석해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있다. '원년'이라고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봄'을 먼저 쓴 것은 왜인가? '왕의 정월'이라고 한 것은 주 왕실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뜻인가? 공자가 이 구절을 이렇게 쓴 의도는 무엇인가? 학생들은 박사의 해석을 듣고 기록한다. 필사하고 암기한다. 시험에서는 그 해석을 재현해야 한다.
춘추전국시대의 교육이 "인이란 무엇인가"처럼 삶 전체를 향해 열린 질문을 던졌다면, 태학의 교육은 "이 텍스트의 이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처럼 텍스트 안으로 좁혀진 질문을 다루었다. 전자는 개방적 질문이다. 답이 여러 개일 수 있고, 답이 없을 수도 있다. 후자는 폐쇄적 질문이다. 텍스트가 있고, 그 텍스트의 '올바른' 해석을 찾는 것이 목표다. 물론 해석을 둘러싼 학파 간 논쟁은 존재했다. 하지만 그 논쟁조차 텍스트의 울타리 안에서 벌어졌다.
'박사'라는 단어의 운명을 추적해 보면, 이 변화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춘추전국시대에도 '박사'라는 호칭은 있었다. 그것은 '널리 아는 사람(博學之士)'이라는 뜻이었다. 다양한 분야에 통달한 학자, 자기만의 사상을 개발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독립적인 지식인을 가리켰다. 공자가 그랬고, 묵자가 그랬으며, 장자가 그랬다. 그들은 어떤 국가에도 고용되지 않았다. 자기 사상이 채택되면 관직을 얻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은 자유로운 질문자였다.
한나라의 박사는 달랐다. 그들은 국가가 임명한 관직이었다. 정확한 명칭은 '오경박사(五經博士)'였다. 시경 박사, 서경 박사, 역경 박사, 예기 박사, 춘추 박사. 각자 하나의 경전을 담당했고, 국가가 인정한 방식으로 그 경전을 해석하여 가르쳤다. 급여를 받았고, 관료 체계의 일부였다.
이 변화의 의미를 곱씹어 보자. 춘추전국시대의 지식인은 '무엇을 물을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했다. 공자는 '인'을 물었고, 묵자는 '겸애'를 물었으며, 장자는 '도'를 물었다. 질문의 내용과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곧 사상가의 정체성이었다. 하지만 한나라의 박사에게는 질문이 이미 주어져 있었다. "이 경전의 이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질문이 아니라 해석이었다. 질문하는 학자에서 해석하는 관료로. 이것이 한나라가 만들어낸 지식인의 새로운 초상이었다.
한나라의 경학(經學)은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정교하게 발전했다.
텍스트의 문자 하나하나를 분석하고(훈고학), 구절의 의미를 풀이하고(주석학), 서로 다른 판본을 대조하고(교감학), 경전 간의 관계를 체계화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칼리마코스가 장서를 분류하고, 학자들이 호메로스의 텍스트에 주석을 달던 작업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지구의 양쪽 끝에서, 지적 활동이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기존 텍스트를 정리하고 해석하는 것'으로 이동하는 같은 패턴이 반복된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자연과학과 수학도 다루었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지구 둘레 측정,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학, 히파르코스의 천문학. 이것들은 텍스트가 아니라 자연을 향한 질문이었다. 자연은 경전처럼 '올바른 해석'이 정해져 있지 않다. 관측하고, 측정하고, 가설을 세우고, 검증해야 한다. 질문이 텍스트 안에 갇히지 않고 바깥 세계를 향해 열려 있었다.
한나라의 경학은 이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물론 한나라에도 뛰어난 기술과 발명이 있었다. 종이, 지진계, 수레의 거리 측정기. 하지만 이것들은 경학과 별개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교육의 중심은 언제나 경전 해석이었다. 자연을 관찰하고 측정하는 것이 학문의 중심이 되지 못한 것. 이것은 이후 동아시아 지적 전통에서 과학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 여러 요인 중 하나로 꼽히곤 한다.
오경이 정전이 되면서, 흥미로운 부작용도 생겨났다. 해석을 둘러싼 학파 간 대립이었다.
한나라 경학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금문학파(今文學派)와 고문학파(古文學派)다. 금문학파는 한나라 시대에 유통되던 판본(당시의 문자인 '금문'으로 쓰인 것)에 기반하여 경전을 해석했다. 이들은 경전의 '뜻'을 중시했고,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처럼 정치적 해석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고문학파는 분서갱유를 피해 벽 속에 숨겨져 있다가 발견되었다는 고대 판본('고문'으로 쓰인 것)에 기반하여, 텍스트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중시했다.
두 학파는 수십 년에 걸쳐 격렬하게 논쟁했다. 어느 판본이 진짜인가? 어느 해석이 공자의 원래 뜻에 가까운가? 이 논쟁은 때로 정치적 세력 다툼과 결합되어 학자들의 생사를 가르기도 했다. 그 자체로 지적 열정의 산물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발 물러서 보면, 이 모든 논쟁이 '경전의 울타리 안'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공자의 원래 뜻은 무엇인가"를 놓고 싸웠지, "공자의 뜻이 과연 옳은가"를 물은 것은 아니었다. 질문의 공간이 텍스트 안으로 한정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을 짚고 넘어가자.
한나라가 유교를 공식 이념으로 삼은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유교를 살린 것이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 거의 소멸될 뻔한 유교 텍스트가 국가의 보호 아래 수집되고, 필사되고, 보존되었다. 태학이라는 제도적 기반 위에서 유교는 체계화되고 발전했다. 이것이 없었다면 논어는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유교를 변질시킨 것이기도 했다. 공자가 아고라의 소크라테스처럼 열린 대화 속에서 던졌던 질문들이, 국가가 관리하는 교과서 안에 갇혔다. "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더 이상 제자와 스승이 함께 탐구하는 살아 있는 물음이 아니라, 시험에서 정해진 답을 재현해야 하는 과제가 되었다.
보존과 왜곡.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세상의 모든 책을 모으면서 질문을 보존했지만, 동시에 질문을 두루마리 속에 고정시켜버린 것과 같은 역설이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다. 지식을 제도 안에 넣으면 생존은 보장되지만, 생명력은 줄어든다. 이것은 교육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딜레마다.
한나라가 만든 이 구조―유교라는 단일 이념, 오경이라는 정전, 태학이라는 교육 기관, 경전 해석이라는 학문 방식, 시험을 통한 관료 선발―는 이후 2,000년 동안 동아시아 교육의 기본 골격으로 작동한다.
이 골격 위에, 약 1,000년 뒤, 한 사람이 지붕을 올린다. 남송(南宋)의 주희(朱熹). 그는 오경보다 더 핵심적인 텍스트로 사서(四書)―논어, 맹자, 대학, 중용―를 편찬하고, 모든 구절에 주석을 달아, 질문을 완전한 체계 안에 가둔다. 공자가 열어두었던 질문들이, 주희의 손에서 어떻게 최종적인 답을 얻게 되는가. 그 이야기를 다음에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