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넘치던 시절
백가쟁명, 질문이 생존의 조건이었던 시대
어느 날, 안연이 물었다. "스승님, 인(仁)이 무엇입니까?"
공자는 가장 사랑하는 제자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대답했다. "자기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克己復禮爲仁)."
며칠 뒤, 중공이 똑같은 질문을 했다. "스승님, 인이 무엇입니까?" 이번에 공자의 대답은 달랐다. "문을 나서면 큰 손님을 맞이하듯 하고, 백성을 부리되 큰 제사를 받들듯 하라.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
또 며칠 뒤, 자장이 물었다. 공자는 이번에는 "다섯 가지 덕목―공손함, 관대함, 신뢰, 민첩함, 은혜―을 천하에 행할 수 있으면 인이다"라고 답했다. 사마우가 물었을 때는 "인한 사람은 말을 더디 한다"고만 했다.
제자들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같은 질문에 스승의 대답이 매번 달랐으니까. 혹시 스승이 우리를 시험하고 계시는 것일까? 아니면 스승도 답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이것이 바로 가르침의 방식인 것일까―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수준과 처지에 맞는 실마리를 던져주고, 나머지는 스스로 찾아가게 하는 것?
논어(論語)라는 책이 독특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정답을 모아놓은 교범이 아니다. 대화의 기록이다. 그것도 답이 매번 달라지는 대화의 기록. 우리가 교과서에서 만나는 공자―온화하지만 위엄 있고, 모든 것에 정답을 가진 성인―는 실제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와 상당히 다르다. 논어의 공자는 때로는 답을 모른다고 말하고, 때로는 화를 내며, 때로는 제자에게 혹독한 말을 퍼붓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한 번도 확정적인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공자가 활동한 시기,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의 중국은 어떤 세계였을까.
상상해 보자. 드넓은 황하 유역에 수십 개의 나라가 흩어져 있다. 각 나라의 군주는 자기 영토를 지키기 위해, 혹은 넓히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주(周) 왕실이라는 명목상의 중앙 권위가 있지만, 실질적인 힘은 없다. 종이 위의 왕이다. 실제 권력은 제후들에게 있고, 제후들 사이의 경쟁은 점점 치열해진다. 전쟁은 일상이다. 어제의 동맹이 오늘의 적이 된다. 한 나라가 멸망하면 그 땅과 백성은 승자에게 흡수된다. 이것이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221년), 약 550년에 걸친 분열과 전쟁의 시대다.
하지만 이 혼란 속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인류 사상사에서 가장 폭발적인 지적 활동이 꽃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 불렀다. 백 개의 학파가 다투어 울린다는 뜻이다.
왜 하필 이 시기였을까. 왜 평화로운 시대가 아니라 전쟁의 시대에 질문이 넘쳤을까.
답은 단순하다. 정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 왕실이 건재하던 시절에는 통치의 원리가 정해져 있었다. 예(禮)와 악(樂)에 따라 다스리면 되었다. 하지만 주 왕실이 무너지면서, 그 원리도 함께 무너졌다.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인간은 본래 어떤 존재인가? 전쟁을 어떻게 끝낼 수 있는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이 모든 질문이 한꺼번에 열려버렸다. 그리고 제후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다. 더 나은 답을 찾은 나라는 살아남았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멸망했다.
사상가들은 이 수요에 응답했다. 공자는 제자 수십 명을 이끌고 14년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기 사상을 팔았다. '팔았다'는 표현이 거칠게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 그랬다. 사상가들은 자기 학설을 군주에게 제안하고, 채택되면 관직을 얻었다. 채택되지 않으면 다른 나라로 떠났다. 이것은 지식의 시장이었다. 아테네에서 소피스트들이 돈을 받고 수사학을 가르치며, 학생들이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니며 자기에게 맞는 질문을 찾았던 것과 놀랍도록 닮은 구조다.
공자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공자(기원전 551~479년)는 노(魯)나라 사람이었다. 귀족 가문이었지만 몰락한 집안이었고, 젊었을 때는 창고지기와 목장 관리 같은 하급 관직을 전전했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교육자였다. "묶은 고기(束脩) 이상의 예물을 가져온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가르침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분에 관계없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면 가르쳤다는 뜻이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교육이 귀족의 전유물이던 시대에, 공자는 교육의 문을 넓힌 최초의 사람 중 하나였다.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말 중 하나는 이것이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와 얼마나 닮았는가. 지구의 양쪽 끝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두 사람이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확실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 무지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지혜의 출발점이라는 것.
공자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不憤不啓), 답답해하지 않으면 이끌어주지 않는다(不悱不發)." 학생이 스스로 고민하여 답답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로소 실마리를 던져주겠다는 뜻이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산파'라고 불렀던 것을 떠올려 보라. 산파는 아이를 대신 낳아주지 않는다. 산모가 스스로 낳을 수 있도록 돕는다. 공자의 태도도 이와 같았다. 답을 직접 주지 않고, 제자가 스스로 답에 도달하도록 기다리고 이끄는 것.
그리고 그의 핵심 개념인 '인(仁)'은 논어에서 수십 번 등장하지만, 단 한 번도 똑같이 정의되지 않는다. 공자는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는다(吾道一以貫之)"고 했지만, 그 '하나'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제자 증자가 나중에 "충(忠)과 서(恕)일 것이다"라고 추측했을 뿐이다. '인'은 정의되지 않은 채 남겨진 개념이었다. 그것은 약점이 아니라 의도였다. 답을 닫지 않고 열어둠으로써, 각자가 자기 삶 속에서 '인'이 무엇
인지를 스스로 찾아가게 하는 것. 이것이 공자의 교육법이었다.
하지만 공자의 방식이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진짜 힘은 하나의 위대한 사상가가 아니라, 여러 사상가가 서로 충돌하고 경쟁한 데 있었다.
공자가 죽은 뒤 약 100년, 맹자(기원전 372~289년경)라는 사상가가 등장했다. 맹자는 공자의 적통을 자처했지만, 공자가 열어두었던 질문에 과감하게 답을 내렸다. 가장 유명한 것이 성선설이다.
맹자가 든 예는 단순하고 강력했다.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것을 보면, 누구나 깜짝 놀라며 측은한 마음이 든다. 그 아이의 부모와 친분을 맺기 위해서도 아니고, 마을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서도 아니며, 아이의 울음소리가 싫어서도 아니다. 그저 순간적으로, 반사적으로 측은한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맹자는 이 마음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측은지심 외에도 수오지심(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지심(양보하는 마음), 시비지심(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 이 네 가지 마음의 싹, 사단(四端)은 인간 본성에 내장되어 있다. 교육이란 이 싹을 키우는 것이다. 본래 선한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거의 같은 시기, 정반대의 주장을 한 사람이 있었다. 순자(기원전 313~238년경)였다. 순자도 유가의 전통에 속했지만, 인간에 대한 시선은 맹자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익을 좇고, 욕망에 끌리며, 시기와 질투를 품는다. 이 본성을 그대로 두면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따라서 교육은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교정'하는 것이다. 엄격한 훈련, 예법, 규율. 인간을 문명화시키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위적 노력이다.
잠시 멈추어 이 논쟁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맹자와 순자의 대립은 단순한 철학적 논쟁이 아니었다. 교육의 근본 방향이 걸린 문제였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교육은 부드러워야 한다. 씨앗에 물과 햇빛을 주듯, 아이의 선한 본성이 자라도록 도와주면 된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면, 교육은 엄격해야 한다. 야생의 나무를 깎고 다듬어 쓸모 있는 도구로 만들듯, 규율과 반복으로 인간을 빚어내야 한다. 오늘날에도 교육을 둘러싼 논쟁은 결국 이 갈림길로 돌아온다. 아이를 믿고 기다릴 것인가, 아이를 훈련시키고 교정할 것인가. 2,300년 전의 질문이 여전히 답이 나지 않은 채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유가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풍경은 더욱 다채로워진다.
장자(기원전 369~286년경)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도가(道家)의 사상가였는데, 공자와 맹자가 그토록 진지하게 논했던 '인'이니 '의(義)'니 하는 개념을 정면으로 조롱했다. 장자가 보기에, 도덕이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물고기에게 물이 보이지 않듯, 도(道) 안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도덕이 필요 없다. 도덕이 필요해진 것은, 이미 도에서 벗어났다는 증거다. "큰 도가 무너진 뒤에야 인의(仁義)가 나타났다"는 것이 장자의 진단이었다.
장자에게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장자가 다리 위에서 물고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물고기가 나와서 한가롭게 노니는구나.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다." 친구 혜시(惠施)가 반박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장자가 대답했다.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가?" 혜시가 다시 반박했다. "나는 자네가 아니니까 자네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자네도 물고기가 아니니까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은 확실하다." 장자가 웃으며 말했다. "처음으로 돌아가세. 자네가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라고 물었을 때, 자네는 이미 내가 안다는 것을 알고서 물은 것이 아닌가. 나는 이 다리 위에서 알았다네."
이 대화는 장자 특유의 논리적 유희이자, 동시에 깊은 철학적 질문을 담고 있다. 우리는 다른 존재의 경험을 알 수 있는가? 지식의 한계는 어디인가? 장자는 공자처럼 도덕적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는 질문 자체를 질문했다. 우리가 '안다'고 할 때 정말 아는 것인가? 우리가 '옳다'고 할 때 정말 옳은 것인가? 이것은 2,300년 뒤에 비트겐슈타인이나 데리다 같은 서양 철학자들이 던지게 될 질문의 선구였다.
장자의 반대편에는 묵자(기원전 470~391년경)가 있었다. 묵자는 장자와 달리, 극도로 실용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겸애(兼愛)를 주장했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가는 가족을 먼저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점차 넓혀 나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맹자는 "자기 아이를 사랑하듯 남의 아이를 사랑하라"고 했지, "자기 아이와 남의 아이를 똑같이 사랑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묵자는 정확히 그것을 요구했다. 자기 나라와 남의 나라, 자기 가족과 남의 가족을 차별하지 말라. 차별하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약탈이 일어나고, 불의가 생겨난다.
묵자는 또한 전쟁에 반대했다(비공, 非攻). 그는 말로만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묵가 집단은 실제로 약소국이 침략받을 때 가서 성을 지켜주었다. 방어 기술에도 뛰어나서, 공성전에 대항하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사상가이면서 동시에 기술자이고 활동가였던 것이다. 그의 사상은 2,300년 뒤 벤담의 공리주의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가장 많은 사람에게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옳은 일이다.
맹자는 묵자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묵자의 겸애를 따르면 아버지가 없는 것이다(墨氏兼愛, 是無父也)." 가족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부정하면, 인간 관계의 근본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이 논쟁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보편적 박애와 가족적 유대 사이의 긴장. 세계시민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의 긴장. 모든 생명의 동등한 가치를 주장하는 동물권 운동과 인간 중심의 윤리 사이의 긴장. 2,300년 전 맹자와 묵자가 벌인 논쟁은 형태를 바꾸어 오늘도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이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가장 끝에, 질문 자체를 거부한 사상이 있었다. 법가(法家)였다.
한비자(기원전 280~233년경)는 도덕을 믿지 않았다. 인간은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군주와 신하 사이에도 사랑이 아니라 이해관계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통치는 도덕이 아니라 법률과 상벌에 의존해야 한다. "현명한 군주는 법을 신뢰하지,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한비자에게 유가의 토론과 묵가의 논쟁은 시간 낭비였다.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명확한 법을 세우고,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철저히 하면 된다. 더 이상 무슨 질문이 필요한가?
진(秦)나라의 시황제는 법가를 채택했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진시황은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했다. 법가 이외의 책을 불태우고, 유가 학자들을 생매장한 사건이다. 질문의 시장을 물리적으로 폐쇄한 것이다.
진나라는 15년 만에 무너졌다. 너무 가혹해서 백성들이 들고일어났다. 하지만 진나라가 보여준 것―질문을 억압하면 통치는 효율적이지만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통일 제국에서 질문의 자유는 언제나 위태롭다는 것―은 이후 2,000년간 반복될 패턴의 예고편이었다.
이 모든 것을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춘추전국시대의 풍경은 아테네의 풍경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지구의 양쪽 끝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거의 같은 조건에서, 거의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치적 통일이 없는 곳에서 질문이 폭발했다. 여러 학파가 경쟁했다. 사상가들은 자기 학파를 열고 제자를 모았다. 공자의 유가, 묵자의 묵가, 장자의 도가는 플라톤의 아카데미,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 에피쿠로스의 정원에 대응한다. 어느 사상이 옳은지는 정해져 있지 않았고, 그 열린 상태가 사유의 깊이를 만들었다.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축의 시대(Axial Age)'라 불렀다. 기원전 8세기에서 3세기 사이,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중국에서는 공자와 장자가, 인도에서는 붓다와 마하비라가, 이스라엘에서는 예레미야와 이사야가 거의 동시에 인류 사상의 기초를 놓았다. 왜 이런 동시성이 나타났는지는 지금도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시대에 태어난 질문들은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답이 나지 않은 채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정의로운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해야 하는가.
하지만 아테네와 춘추전국시대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아테네의 질문은 로마에 의해 흡수되면서 서서히 변형되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에서 다시 되살아났고, 근대 대학에서 제도화되었다. 하지만 중국의 질문에게는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의 통일,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한나라. 통일 제국은 질문의 다양성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나의 제국에는 하나의 사상이면 충분했다. 춘추전국시대의 백가쟁명은 어떻게 하나의 경전으로 수렴하게 되었는가. 그 이야기를 다음에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