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축적하다
질문이 대화에서 수집으로, 광장에서 서가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들어선 학자는 가장 먼저 그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파피루스의 냄새. 나일 강 삼각주에서 자란 갈대를 얇게 저며 말린 뒤, 두드려 납작하게 만든 종이에서 나는 풀 비린내와 먼지의 중간쯤 되는 냄새. 거기에 잉크 냄새가 섞인다. 그을음과 아카시아 수지를 개어 만든 검은 잉크를 수백 명의 필경사가 동시에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공기 전체가 그 냄새로 무거웠을 것이다. 그리고 소리. 아고라의 소리가 수백 명이 동시에 떠드는 웅성거림이었다면, 도서관의 소리는 달랐다. 갈대 펜이 파피루스 위를 긁는 사각거림, 두루마리를 펼치고 감는 바스락거림, 낮은 목소리로 텍스트를 읽어주는 소리. 간혹 복도 저편에서 두 학자가 언성을 높이는 소리가 들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고라의 그것과는 질이 달랐다. 여기서의 논쟁은 시민 전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파피루스 위에 적힌 한 줄의 문장을 향한 것이었다.
도서관의 복도를 따라 걸어가면 수천 권의 두루마리가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다. 어느 방에서는 히브리어 토라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학자가 단어 하나에 머리를 싸매고 있다. 다른 방에서는 밤하늘의 별 위치를 기록하는 천문학자가 도표 위에 점을 찍고 있다. 또 다른 방에서는 ── 이것은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던 일이었는데 ── 사형수의 시체를 해부하며 신경이 뇌에서 시작되는지 심장에서 시작되는지를 확인하려는 의학자가 있다.
이곳은 지식의 공장이었다. 그런데 아테네의 아고라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공장이었다. 아고라는 질문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질문이 정리되고, 분류되고, 보관되는 곳이었다.
이 거대한 도서관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바빌론에서 죽었다. 서른두 살이었다. 그가 남긴 것은 그리스에서 인도까지 이르는 광대한 제국과, 그 제국을 서로 차지하려는 장군들의 치열한 다툼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장군이 이집트를 차지했다. 그는 나일 강 하구에 알렉산드로스의 이름을 딴 도시를 수도로 삼았다. 알렉산드리아.
프톨레마이오스는 군인이었지만, 범상치 않은 야심을 품고 있었다. 군사력만으로는 제국을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세계의 지적 중심지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뮤세이온(Mouseion)을 세웠다. 무사(Muse) 여신들에게 바친 신전이라는 뜻이었지만, 실제로는 오늘날의 연구소에 가까운 곳이었다. 그리고 이 뮤세이온에 부속된 시설이 바로 그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그리스 세계 전역에서 학자들을 초청했다. 초청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스카우트에 가까웠다. 급여를 주고, 숙소를 제공하고,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게 했다. 세금도 면제해 주었다. 아테네에서 학자들이 스스로 학교를 운영하며 제자들의 등록금으로 겨우 살아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이 차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질문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아테네에서 질문은 시민의 공적 행위였다. 광장에서, 법정에서, 시민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행위였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 질문은 전문가의 직업이 되었다. 왕이 고용한 학자들이 왕이 지은 건물에서 왕이 지급한 급여를 받으며 수행하는 일이었다. 질문은 공적 광장에서 내려와, 제도의 벽 안으로 들어갔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목표는 단순했고, 동시에 미친 듯이 야심 찼다. 세상의 모든 책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리스어 책만이 아니었다. 이집트어, 페르시아어, 히브리어,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경전까지 수집 대상이었다.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배가 들어오면, 도서관 직원이 승선하여 배에 실린 책을 모두 압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필경사들이 사본을 만들어 원본을 돌려주기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원본을 도서관에 남기고 사본을 돌려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진위 여부를 떠나, 이 일화가 보여주는 것은 도서관의 집요한 수집 욕구였다.
장서는 40만에서 70만 권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 세계의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그리고 이 책들을 정리하기 위해 인류 최초의 도서 분류 체계가 만들어졌다. 칼리마코스라는 학자가 『피나케스(Pinakes)』라는 목록을 편찬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도서관 카탈로그의 원형이었다. 저자명, 제목, 권수, 첫 줄의 인용문까지 기록했다.
잠시 생각해 보자. 이것이 왜 중요한가.
아테네에서 지식은 사람 안에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머릿속에, 플라톤의 대화 속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 속에 살아 있었다. 그 사람이 죽으면 지식도 사라질 위험이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글을 한 줄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플라톤이 없었다면 소크라테스는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질문을 텍스트로 고정하고, 텍스트를 사본으로 복제하고, 사본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보관했다. 질문은 더 이상 한 사람의 입에서 다른 사람의 귀로 전달되는 불안정한 것이 아니었다. 파피루스 위에 적힌, 만질 수 있는, 찾아볼 수 있는, 수백 년 뒤에도 읽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 역설이 있었다. 질문을 보존하기 위해 텍스트로 고정하는 순간, 질문은 살아 움직이는 대화의 성격을 잃기 시작했다. 소크라테스가 장군을 붙잡고 "용기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질문은 그 순간, 그 사람에게, 그 맥락에서 던져진 살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이 파피루스에 적히면, 그것은 언제든 꺼내 읽을 수 있는 대신, 누구에게나 같은 형태로 전달되는 고정된 것이 된다. 보존과 경직화는 같은 행위의 양면이었다.
이 도서관에서 일한 학자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오래 지속된 사람을 한 명만 꼽으라면,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를 꼽아야 할 것이다.
에우클레이데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태어난 해도, 죽은 해도 정확하지 않다. 기원전 30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다는 것이 거의 전부다. 외모도, 성격도, 일상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소크라테스가 맨발로 아고라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는 생생한 일화와 비교하면, 에우클레이데스는 거의 유령 같은 존재다.
하지만 그가 남긴 책은 유령과 정반대였다. 『원론(Stoicheia)』. 이 책은 인류 역사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인쇄된 책이라고 불린다. 2,300년 동안 기하학의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뉴턴도, 아인슈타인도, 링컨도 이 책으로 기하학을 배웠다. 링컨은 변호사 시절 논리적 사고를 훈련하기 위해 『원론』을 독학했다고 한다.
에우클레이데스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새로운 정리를 많이 발견한 사람이 아니었다. 『원론』에 수록된 정리 대부분은 이미 피타고라스, 에우독소스, 테아이테토스 같은 선배 수학자들이 증명한 것이었다. 에우클레이데스가 한 일은 그것들을 정리한 것이었다. 다섯 개의 공리에서 출발하여, 한 단계씩 논리적으로 쌓아올려, 465개의 정리를 13권의 책에 담았다.
이것이 왜 혁명적이었을까. 아테네에서 질문은 "왜 이것은 참인가?"라는 형태였다. 대화하고, 논박하고, 다시 물었다. 결론이 나지 않아도 괜찮았다. 과정 자체가 목적이었다. 하지만 에우클레이데스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하나의 체계로 구성할 수 있는가?" 이것은 형이상학적 질문이 아니라 구조적 질문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세상의 모든 책을 모아서 분류한 것처럼, 에우클레이데스는 기하학의 모든 지식을 모아서 구조화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에우클레이데스에게 "기하학을 배우는 더 쉬운 방법은 없는가?"라고 물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에우클레이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이 일화가 사실이든 아니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은 배우기 쉬운 책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질문을 조직하는 방법에 대한 최초의 완성된 모델이었다. 정의에서 출발하여, 공리를 거쳐, 정리에 이르는 이 구조는 2,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과학 논문이 작성되는 방식의 원형이다.
에우클레이데스만이 아니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 자체가 달라진 학자들이 모여 있었다.
에라토스테네스라는 학자는 어느 날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집트 남부의 시에네(오늘날의 아스완)에서는 하짓날 정오에 해가 수직으로 떨어져 우물 바닥까지 빛이 닿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같은 시각,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막대기가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림자의 각도는 약 7.2도였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생각했다. 만약 지구가 평평하다면 같은 시각에 그림자의 길이가 같아야 한다. 다르다는 것은 지구가 둥글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각도 차이와 두 도시 사이의 거리를 알면, 지구의 둘레를 계산할 수 있다. 그의 계산 결과는 약 4만 킬로미터. 실제 지구 둘레와 놀라울 정도로 가깝다.
히파르코스는 밤하늘을 관찰하며 별의 목록을 만들었다. 850개가 넘는 별의 위치를 기록하고, 밝기에 따라 등급을 매겼다. 오늘날 천문학에서 사용하는 등급 체계의 원형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헤로필로스는 인체를 해부하여 동맥과 정맥을 구분하고, 뇌가 지성의 중심이라는 것을 밝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심장이 지성의 중심이라고 주장한 것을 뒤집은 것이다.
이 학자들의 작업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질문의 형태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자연은 왜 이러한가"를 물었다. 만물의 근원은 물인가, 불인가, 수인가. 이것은 형이상학적 질문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은 "이 현상을 어떻게 측정하고 기록할 것인가"를 물었다. 지구의 둘레는 몇 킬로미터인가. 이 별의 위치는 어디인가. 신경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질문은 '왜'에서 '어떻게'로, '사유'에서 '관찰'로, 철학에서 과학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중대한 작업은 번역이었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70인역 성경(Septuagint)이다. 전승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72명의 유대인 학자를 알렉산드리아로 초청하여 히브리어 토라를 그리스어로 번역하게 했다. 72명이 각각 독립적으로 번역했는데 결과가 모두 일치했다는 이야기는 전설이겠지만, 이 번역 자체는 실재했고 그 영향은 막대했다. 히브리어를 읽지 못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그리스어권 이방인들이 유대교 경전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훗날 기독교가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번역은 단순히 언어를 바꾸는 행위가 아니었다. 히브리어의 '루아흐(ruach)'라는 단어는 '바람', '숨결', '영혼'을 동시에 의미한다. 이것을 그리스어 '프뉴마(pneuma)'로 번역하면, 히브리어 원문에 있던 다층적 의미 중 일부가 살아남고 일부가 사라진다. 번역은 지식을 확장하는 동시에 지식을 변형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번역과 함께 주석(Commentary) 전통이 시작되었다. 원전에 대한 주석을 달고, 그 주석에 대한 주석을 다시 달고. 텍스트가 고정되면 될수록, 그 텍스트를 둘러싼 해석의 층은 두꺼워졌다. 이것은 훗날 유대교의 탈무드, 이슬람의 꾸란 주석, 중세 기독교의 성경 주해, 동아시아의 경전 주석 전통으로 이어진다. 주석은 질문을 보존하는 강력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질문의 방향을 "이 텍스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로 고정시키는 방법이기도 했다. 질문이 세계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향하게 된 것이다.
이쯤에서 한 걸음 물러나 전체 그림을 보자.
아테네에서 알렉산드리아로의 이동은 단순한 지리적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질문이 존재하는 방식 자체의 변화였다.
아테네에서 질문은 대화 속에 살았다. 소크라테스가 누군가를 붙잡고 물었고, 상대가 대답했고, 그 대답에 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대화가 끝나면 질문도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플라톤이 기록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질문은 텍스트 속에 살았다. 파피루스에 적히고, 서가에 꽂히고, 목록에 등록되었다. 수백 년이 지나도 꺼내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꺼내 읽는 사람은 더 이상 아고라의 시민이 아니라, 뮤세이온의 학자였다.
아테네에서 질문의 동력은 민주주의였다. 시민이 시민에게 "왜?"라고 물어야 하는 정치적 필요가 질문을 낳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질문의 동력은 왕의 후원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세계의 지적 수도를 만들고자 하는 정치적 야심이 질문을 지원했다. 민주주의가 사라진 자리를 제국의 후원이 채운 것이다. 질문은 살아남았지만, 그 성격은 달라졌다.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자면, 아테네는 질문을 '교육'했고, 알렉산드리아는 질문을 '연구'했다. 아테네의 질문은 시민을 길러내기 위한 것이었고, 알렉산드리아의 질문은 지식을 축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둘 다 필요했다. 하지만 역사는 이 둘의 균형이 무너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오늘날의 교육은 아테네에 더 가까운가, 알렉산드리아에 더 가까운가.
교실을 떠올려 보라. 그곳에서 학생들은 서로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아니면 교과서에 적힌 지식을 흡수하고 있는가. 대학을 떠올려 보라. 그곳에서 학자들은 광장에서 시민과 대화하고 있는가, 아니면 연구실에서 논문을 쓰고 있는가. 인터넷을 떠올려 보라. 그곳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아니면 검색 결과를 소비하고 있는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결국 불탔다. 정확히 언제, 어떻게 파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고 아직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파피루스에 적힌 수십만 권의 지식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텍스트에 고정된 질문은 텍스트와 함께 불탈 수 있었다. 반면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불에 타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대화의 전통 속에서, 그리고 그 대화를 기록한 또 다른 사람의 글 속에서 살아남았다.
질문을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텍스트에 적는 것일까, 사람에게 심는 것일까.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는 각각 다른 답을 제시했고, 그 두 답 사이의 긴장은 2,300년이 지난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