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의 역사] 1-1. 고대 그리스

아고라에서 태어난 질문들

by 쑥갓선생

고대 그리스에서 질문은 공적 행위였다


잠시 상상해 보자. 21세기의 우리가 갑자기 아테네의 아고라로 시간 여행을 한다고 치자.


기원전 5세기, 어느 이른 아침이다. 우리는 아크로폴리스 아래로 펼쳐진 넓은 광장에 서 있다.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냄새다. 올리브 기름에 생선을 지지는 냄새, 갓 구운 빵 냄새, 가죽과 땀과 먼지가 뒤섞인 냄새. 그리고 소리. 수백 명의 사람이 동시에 말하고 있다. 누군가는 도자기를 팔고 있고, 누군가는 법정으로 달려가고 있으며, 누군가는 주랑柱廊 아래에서 큰 소리로 논쟁하고 있다. 스타벅스 커피도, 스마트폰도, 뉴스 피드도 없다. 대신 눈에 띄는 것은 사람들의 입이다. 모든 사람이 말하고 있다. 그것도 상당히 진지하게.


우리는 처음에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소음, 그 혼란, 그 열기. 하지만 잠시 지나면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 광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을. 그리고 그 민주주의를 굴러가게 하는 연료가 다름 아닌 '질문'이라는 것을.


기원전 5세기 아테네는 지중해의 한 도시국가에 불과했다. 인구는 많아야 수만 명이었고, 영토는 오늘날 한국의 작은 군 하나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작은 도시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대담한 정치 실험이 수행되고 있었다.


데모크라티아(demokratia). 시민이 직접 권력을 쥐는 정치.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가 아니라 직접민주주의였다. 시민은 직접 민회(Ekklesia)에 참석하여 법을 제정하고, 전쟁을 결정하고, 재판을 수행했다. 정치인이라는 별도의 직업은 없었다. 시민 전체가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이 시스템이 작동하려면 하나의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시민은 말할 줄 알아야 했다. 자기 주장을 논증할 줄 알아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질문할 줄 알아야 했다. 누군가 "페르시아와 전쟁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다른 누군가는 "왜?"라고 물어야 했다. "근거가 무엇인가?" "다른 방법은 없는가?" 이런 질문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선동으로 변질된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 중 일부는.


아고라의 주랑 아래를 걷고 있는 한 남자를 상상해 보자. 그는 맨발이고, 옷도 남루하며, 외모도 잘생기지 못했다. 코가 납작하고, 눈이 툭 튀어나와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아테네에서 이 남자보다 더 유명한 사람은 없었다. 그의 이름은 소크라테스였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등에'라고 불렸다. 시민들을 괴롭히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아침 아고라에 나갔다. 그리고 눈에 띄는 사람을 붙잡았다. 장군을 붙잡으면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용기가 무엇인지 아시오?" 장군은 당연히 안다고 대답했다. "전투에서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지요." 소크라테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두려움 없이 적진에 돌격하는 것은 용기입니까, 무모함입니까?" 장군은 잠시 멈칫했다. "그건…… 다르지요." "어떻게 다릅니까?" 대화는 점점 깊어졌고, 장군은 자신이 '용기'라는 말을 매일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플라톤의 대화편 『라케스』에 기록된 이 장면에서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친절하지 않았다.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테네에서 이것은 불법이 아니었다. 적어도 한동안은 그랬다. 광장에서 누군가를 붙잡고 "당신은 정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오?"라고 묻는 것은 시민의 권리였고, 어떤 의미에서는 공적 행위였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산파'라고 불렀다. 스스로 지식을 낳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깨달음을 낳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라고 했다. 오늘날의 교육이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소크라테스의 교육은 대화하는 두 사람이 함께 질문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직접 쓴 글은 단 한 줄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가 그를 아는 것은 전적으로 제자 플라톤이 기록한 대화편을 통해서다. 소크라테스에게 지식이란 책에 적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뒤, 아테네에는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스승의 질문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학교를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 학교들은 서로 같은 답을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다른 질문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던졌다.


아테네 서북쪽, 올리브 나무가 우거진 숲 속에 플라톤의 아카데미(Academy)가 있었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기하학과 변증법을 배웠다.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 들어오지 말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플라톤의 질문은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를 향했다. 우리가 보는 이 나무는 '진짜' 나무인가? 아니면 어딘가에 존재하는 완벽한 나무의 그림자에 불과한가? 이것이 이데아론이었고, 플라톤의 학생들은 감각 너머의 진리를 묻는 훈련을 받았다.


아카데미에서 20년을 공부한 뒤, 한 학생이 독립했다.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아테네 동쪽에 리케이온(Lyceum)이라는 자신의 학교를 열었다. 리케이온의 학생들은 숲길을 걸으며 토론했기 때문에 '산책하는 사람들(Peripatetics)'이라고 불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은 스승과 결정적으로 달랐다. 플라톤이 "진짜 나무란 무엇인가"를 물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나무는 어떻게 자라는가"를 물었다. 그는 자연을 관찰하고, 분류하고, 체계화했다. 동물의 종류를 500가지 넘게 기록했고, 정치 체제를 158개 도시국가의 헌법을 비교하며 분류했다.


아고라의 채색 주랑(Stoa Poikile) 아래에서는 제논이 이끄는 스토아 학파가 모였다. 이들의 질문은 더 실존적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상은 통제할 수 없다. 전쟁이 일어나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재산을 잃는다. 그렇다면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스토아 학파는 대답했다. 오직 자신의 태도뿐이라고.

아테네 성벽 밖, 조용한 정원에서는 에피쿠로스가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신은 인간에게 관심이 없고,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에는 여성과 노예도 출입이 허용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아테네에서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네 학교는 아테네의 거리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반경 안에 공존하고 있었다. 어느 학교가 '정답'인지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학생들은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니며 자기에게 맞는 질문을 찾았다. 이것은 질문의 시장이었다. 누구의 질문이 더 설득력 있는지, 누구의 질문이 더 삶을 잘 설명하는지가 경쟁의 대상이었다. 국가가 '이것을 배워라'고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스스로 '무엇을 물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구조. 이것이 아테네 교육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왜 이 질문들은 책상 위가 아니라 광장에서 태어났을까.


아테네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을 잠깐 들여다보면 답이 보인다. 민회가 열리는 날, 수천 명의 시민이 프닉스(Pnyx) 언덕에 모여 앉았다. 안건이 올라오면, 누구든 연단에 올라가 발언할 수 있었다. "시칠리아를 공격해야 합니다. 그곳의 곡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른 시민이 일어나 반박했다. "왜 곡물이 필요한가? 우리에게는 충분한 곡물이 있지 않은가? 당신이 원하는 것은 곡물이 아니라 영토가 아닌가?" 거수로 결정이 내려졌다. 한 표 한 표가 전쟁과 평화를, 삶과 죽음을 가르는 순간이었다.


재판정은 더 극적이었다. 배심원은 200명, 때로는 500명이었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없었다. 피고는 스스로 자기를 변호해야 했고, 원고는 스스로 논증해야 했다. 다수결로 유무죄가 결정되었으므로, 설득이 곧 생존이었다. "당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다른 가능성은 없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또 받아내는 것은 아테네 시민의 일상적 기술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교육은 자연스럽게 질문과 토론의 훈련이 되었다. 그리고 이 수요를 가장 먼저 포착한 사람들이 있었다.


소피스트(Sophist)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프로디쿠스 같은 사람들은 그리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돈을 받고 가르쳤다. 그들이 가르친 것은 논리학, 수사학, 변증법이었다. 어떻게 질문을 구성할 것인가, 어떻게 상대를 논박할 것인가, 어떻게 연설을 구성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인가.


소피스트들은 역사에서 종종 나쁜 평판을 얻었다. 플라톤이 그들을 진리에는 관심 없고 설득의 기술만 파는 사기꾼처럼 묘사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고 말한 프로타고라스는 진리가 상대적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소피스트들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풍경이 달라진다. 그들은 질문의 기술을 체계화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기 주장을 효과적으로 펼치는 법, 상대의 논리에서 허점을 찾는 법, 청중의 감정을 읽고 거기에 맞춰 말하는 법. 이것은 민주주의 시민이 절실하게 필요로 한 실용적 기술이었다. 소피스트가 없었다면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소수의 타고난 웅변가에게 독점되었을지도 모른다.


아테네에서 질문이 가진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의 공공성이었다.


질문은 개인의 서재에서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광장에서, 법정에서, 극장에서, 연회에서 공적으로 수행되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길거리에서 벌어졌고, 플라톤의 대화편은 연회장이나 체육관을 배경으로 했다. 질문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앞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다른 사람을 향해 던져졌다.


이것은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였다. 아테네 시민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선서를 했다. 누군가 독재를 꿈꾼다면 시민들은 질문으로 그를 견제해야 했고, 정책이 잘못되었다면 질문으로 그것을 바로잡아야 했다. 질문은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장치였으며, 질문을 멈추는 것은 곧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아테네였을까. 왜 스파르타가 아니었고, 코린토스가 아니었으며, 테베가 아니었을까.


아테네에는 몇 가지 독특한 조건이 겹쳐 있었다. 우선 노예 제도가 있었다. 불편한 사실이지만 직시해야 한다. 시민이 육체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었기에 토론과 사유에 시간을 쏟을 수 있었다. 아테네는 또한 제국이었다. 델로스 동맹을 주도하며 축적한 막대한 부가 문화와 교육을 지원했다. 그리고 아테네는 작았다. 시민은 수만 명에 불과했으므로 직접 민주주의가 물리적으로 가능했다.


하지만 이 모든 조건을 갖추고도 질문이 꽃피지 못한 도시가 있었다. 스파르타에도 노예가 있었고, 부도 있었으며, 규모도 작았다. 그러나 스파르타에는 질문이 없었다. 군국주의적 질서가 질문을 억압했다. 스파르타의 교육은 질문하는 법이 아니라 복종하는 법을 가르쳤다. 결정적인 차이는 물질적 조건이 아니라 정치적 구조에 있었다. 질문을 허용하는 사회인가, 아닌가. 그것이 모든 것을 갈랐다.


물론 아테네의 질문에는 깊은 그늘도 있었다.


시민이라는 자격은 자유민 남성에게만 주어졌다. 여성은 질문에서 배제되었고, 노예는 질문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으며, 외국인은 아무리 뛰어나도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아테네 시민이 아니었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질문은 보편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특권이었다.


더 아이러니한 사실은, 질문의 도시가 결국 질문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패배한 뒤, 아테네는 30인 독재정이라는 암흑기를 겪었다. 민주주의가 복구된 뒤에도 상처는 깊었다. 시민들은 불안했고, 누군가를 탓하고 싶었다. 그 과녁이 소크라테스에게 향했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재판을 받는다. 혐의는 두 가지였다.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것. 501명의 배심원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자기 변호를 했다. 하지만 그의 변론은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질문이었다. "나는 아테네에 신이 보낸 선물이다. 등에처럼 당신들을 귀찮게 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280 대 221로 유죄 평결이 내려졌다. 질문의 도시가, 질문하는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


하지만 독배를 마시며 죽어간 그 남자가 남긴 것은, 죽음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아테네는 인류에게 하나의 원형을 남겼다. 질문은 사치가 아니라 시민의 권리라는 것. 대화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탐구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토론은 승패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가까워지는 과정이라는 것.


오늘날 우리가 교육에서 여전히 회복하고자 하는 것들이 바로 이것이다. 토론 수업, 세미나, 발표, 디베이트. 이 모든 것은 2,400년 전 아테네의 아고라에서 맨발의 남자가 시민들을 붙잡고 "당신은 정말 알고 있는가?"라고 물었던 그 장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잠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질문에 진심으로 당황한 적이 언제인가? 우리의 교실에서, 우리의 회의실에서, 우리의 일상에서 소크라테스 같은 질문은 아직 가능한가? 아니, 그런 질문이 허용되기는 하는가?


아테네에서 질문은 광장의 햇빛 아래에서 공적으로 수행되었다. 하지만 곧, 질문은 다른 형태를 띠게 된다. 광장이 아니라 도서관으로, 토론이 아니라 수집으로, 대화가 아니라 정리로. 지중해를 건너 알렉산드리아에서 질문은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한다.

이전 01화[질문의 역사] 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