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의 역사] 1-3. 두 모델의 현대적 계보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는 아직 살아 있다

by 쑥갓선생

두 개의 장면을 상상해 보자.


첫 번째 장면. 미국 동부의 어느 대학, 가을 학기. 떡갈나무 잎이 붉게 물든 캠퍼스 한쪽, 낡은 벽돌 건물 3층의 작은 세미나실이다. 긴 타원형 테이블 주위에 열두 명의 학생이 앉아 있다. 테이블 위에는 플라톤의 『국가』 사본이 펼쳐져 있다. 교수는 테이블 끝에 앉아 있지만, 학생들보다 높은 곳에 있지 않다. 교수가 입을 연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자기 것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여러분은 동의합니까?" 침묵이 흐른다. 한 학생이 조심스럽게 손을 든다. "그런데 '자기 것'이라는 게 뭔지가 먼저 정의되어야 하지 않나요?" 교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좋은 질문입니다. 누가 답해 볼까요?" 다른 학생이 끼어든다. "그건 순환 논증 아닌가요?" 토론이 시작된다. 90분 후, 정의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학생들은 수업이 시작되기 전보다 '정의'라는 단어의 무게를 더 깊이 느끼며 교실을 나선다.


두 번째 장면. 같은 대학, 캠퍼스 반대편. 거대한 강의동의 계단식 강의실에 300명의 학생이 앉아 있다. 앞쪽 스크린에는 분자생물학 슬라이드가 띄워져 있다. 교수가 마이크를 잡고 설명한다. "DNA 복제 과정에서 헬리카아제가 이중나선을 풀고, 프라이마아제가 RNA 프라이머를 합성합니다." 학생들은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며 받아 적는다. 슬라이드가 넘어간다. 또 받아 적는다. 50분 후 강의가 끝나면, 학생들은 시험에 나올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한다. DNA 복제 과정에 대해 "왜?"라고 묻는 학생은 거의 없다. 시험에는 "어떻게"만 나오기 때문이다.


첫 번째 교실은 아테네의 아고라를 닮았다. 두 번째 교실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을 닮았다. 고대 그리스는 2,400년 전에 사라졌지만, 이 두 모델은 오늘날 우리 교육의 깊은 곳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이 두 모델이 어떻게 현대까지 살아남았는지를 추적하려면, 중세 유럽의 대학으로 가봐야 한다.


12세기, 파리와 볼로냐에서 유럽 최초의 대학들이 탄생했다. 이 대학들은 처음부터 두 개의 서로 다른 전통을 품고 있었다. 하나는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고 주석을 다는 전통이었다. 스콜라 철학이라 불리는 이 전통에서,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를 정독하고, 모든 질문에 체계적인 답을 구성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이 전통의 기념비적 산물이다. 수천 개의 질문을 제기하고, 각각에 대해 반론을 정리하고, 다시 답변을 제시하는 구조. 이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유산이었다. 질문을 수집하고, 분류하고, 텍스트 안에 고정시키는 작업.


하지만 중세 대학에는 또 하나의 전통이 있었다. 디스푸타티오(disputatio), 공개 논쟁이었다. 학생이 명제를 제시하면 다른 학생이 반박하고, 교수가 판정하는 형식. 이 시간에 학생들은 수동적인 청취자가 아니었다. 논리적으로 공격하고, 방어하고, 다시 공격해야 했다. 중세 파리 대학의 디스푸타티오는, 2,400년 전 아테네의 아고라에서 소크라테스가 시민을 붙잡고 논박하던 그 행위의 먼 후손이었다.


두 전통은 수백 년 동안 공존했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강의(lectio)와 질문을 주고받는 논쟁(disputatio)이 한 대학 안에서 나란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두 전통의 균형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9세기 초 베를린에서 찾아온다.


1810년, 프로이센의 교육 관료 빌헬름 폰 훔볼트가 베를린 대학을 설립했다. 이 대학은 이전의 어떤 대학과도 달랐다. 훔볼트가 내세운 원칙은 두 가지였다. 교수에게는 가르치고 연구할 자유(Lehrfreiheit)를, 학생에게는 배울 자유(Lernfreiheit)를. 그리고 핵심 슬로건은 이것이었다. "교육과 연구의 통일." 대학은 이미 알려진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곳이어야 한다. 학생은 완성된 지식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배워야 한다.


훔볼트의 이상은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의 결합이었다. 연구소처럼 지식을 축적하되, 세미나처럼 대화와 토론을 통해 가르치겠다는 것. 이 모델에서 두 가지 교육 형식이 탄생했고, 둘 다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


세미나(Seminar). 소규모 그룹이 텍스트를 함께 읽고 토론하는 시간. 교수는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토론을 이끄는 사람이다. 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 학생들은 자기 해석을 말하고, 다른 학생의 해석에 반박하고, 함께 더 나은 이해를 향해 나아간다. 이것은 아테네의 대화 전통이 19세기에 부활한 형태였다.


강의(Lecture). 교수가 수백 명의 학생 앞에서 지식을 체계적으로 전달하는 시간. 학생은 듣고, 기록하고, 나중에 복습한다. 효율적이다. 한 사람의 전문가가 수백 명에게 동시에 지식을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축적과 정리 전통이 교실이라는 형식을 입은 것이었다.


훔볼트는 이 둘이 균형을 이루기를 원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균형은 결정적으로 한쪽으로 기울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국가가 대학에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했다. 무기 기술, 의약품, 통신 시스템, 암호 해독. 국가는 대학에 연구를 의뢰했고, 대학은 지식 생산의 공장으로 변모했다. 미국에서 맨해튼 프로젝트가 원자폭탄을 만들어낸 것은 대학의 물리학자들이었다. 페니실린을 대량 생산한 것도, 레이더를 개발한 것도, 컴퓨터의 원형을 설계한 것도 대학의 연구자들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구조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강화되었다. 1945년, 미국의 과학 고문 배너바 부시(Vannevar Bush)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과학, 끝없는 프론티어(Science, The Endless Frontier)』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핵심 주장은 이것이었다. 정부가 대학의 기초 연구에 체계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이 보고서가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의 설립으로 이어졌고, 이후 전 세계 대학이 "연구 중심 대학"이라는 모델을 향해 경쟁적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논문이 교육의 중심에 섰다. 박사 학위는 논문으로 부여되었다. 교수의 능력은 논문의 수와 인용 횟수로 측정되었다. 연구비를 얼마나 따오느냐가 학과의 생존을 결정했다. 세미나에서 학생과 나누던 대화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대학이라는 기관을 움직이는 진짜 엔진은 논문과 연구비였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모델의 완성이었다. 지식을 생산하고, 텍스트로 고정하고, 동료 평가를 통해 검증하고, 학술지에 축적한다. 질문은 더 이상 광장에서 시민이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전문 저널의 페이지 안에 갇혀 있었다.


교수라는 존재도 이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변모했다.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는 시민 사이를 걸어 다니며 대화했다. 돈을 받지 않았고, 교실도 없었으며, 학위도 수여하지 않았다. 그의 수업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학자는 국가의 지원을 받고 연구하는 전문가였다. 그의 결과물은 두루마리에 적혀 도서관 서가에 꽂혔다.


오늘날의 교수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 "출판하지 않으면 도태된다(Publish or perish)." 이 문구가 현대 대학의 공기를 지배한다. 교수는 논문을 써야 하고, 연구비를 따야 하며, 학술지에 실려야 한다. 가르치는 일은 중요하다고 말해지지만, 승진 심사에서 결정적인 것은 연구 업적이다. 세미나에서 학생과 두 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벌인 교수보다, 네이처에 논문 한 편을 실은 교수가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소크라테스가 이것을 본다면 무어라 했을까. "당신은 논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논문을 쓰면 지혜로워지는 것이오?" 아마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학생의 위치도 바뀌었다. 아테네에서 청년들은 소크라테스를 따라다니며 대화에 참여했다. 그들은 질문을 던지고, 반박하고, 토론의 주체였다. 오늘날 대학생은 강의실에 앉아 강의를 듣고, 시험을 보고, 학점을 딴다. 연구에 참여하는 것은 대학원에 가서야 가능한 일이다. 학부 4년 동안 대부분의 학생은 질문의 소비자이지 생산자가 아니다. 누군가 정리해 놓은 지식을 전달받고, 그것을 정확히 재현할 수 있는지를 시험받는다. 이것은 아테네가 아니라 알렉산드리아도 아닌, 어딘가 더 수동적인 곳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은 적어도 스스로 연구하고 있었으니까.


한국의 교실은 이 이야기에서 어디쯤에 위치할까.


한국 근대 교육의 기원은 복잡하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제국대학 모델이 이식되었다. 이 모델은 국가가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실용적 교육을 목표로 했다. "왜?"를 묻는 시민이 아니라 "어떻게?"를 수행하는 관료와 기술자를 길러내는 것. 이것은 알렉산드리아보다는 로마에 가까운 모델이었다(로마에 대해서는 3장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해방 이후, 미국의 대학 모델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수입된 것은 훔볼트의 이상―교육과 연구의 통일, 세미나와 강의의 균형―이 아니라, 주로 외형이었다. 학과 체제, 학점 제도, 졸업 요건. 세미나의 전통은 이식되지 않았다. 대신 강의실은 더 커졌고, 학생 수는 더 늘었으며, 시험은 더 표준화되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대학은 강의 중심, 시험 중심, 논문 중심의 구조를 갖게 되었다. 아테네의 전통―대화, 토론, 불확실성을 견디는 훈련―은 상대적으로 희미하다. 물론 세미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이 4년간 경험하는 교육의 압도적 형식은 강의와 시험이다.


그리고 이 모델은 대학에 머물지 않았다. 아래로 흘러내려 고등학교를, 중학교를, 심지어 초등학교를 침식했다. 수능이라는 단일한 시험이 교육 전체를 지배하는 구조에서, 질문은 사치가 되었다. "선생님, 이건 시험에 나오나요?" 이 질문이야말로 알렉산드리아 모델이 극단적으로 변형된 결과다. 지식을 축적하고 분류하는 것이 원래 목적이었는데, 어느 순간 축적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왜 이 지식이 필요한지, 이 지식으로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는 물어볼 틈이 없다.


그런데 지금,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판이 뒤집히고 있다.


2022년 11월, ChatGPT가 세상에 등장했다. 그 뒤로 일어난 일은 모두가 알고 있다. AI는 알렉산드리아 모델이 수천 년에 걸쳐 쌓아 올린 것을 놀라운 효율로 수행하기 시작했다. 지식을 수집하고, 정리하고, 체계화하고, 요약하고, 심지어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내는 것.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 수백 명의 필경사와 번역가를 고용해서 수십 년에 걸쳐 한 일을, AI는 몇 초 만에 해낸다.


이것이 교육에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이다. 만약 AI가 알렉산드리아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면, 인간의 교육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역설적이게도, AI 시대에 다시 필요해진 것은 아테네의 유산이다. 대화, 토론, 비판적 사고. 불확실성 앞에서 질문을 던지는 용기. 정해진 답이 없는 상황에서 자기만의 판단을 내리는 능력. AI는 "DNA 복제 과정을 설명하시오"라는 질문에 완벽한 답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유전자를 편집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답을 줄 수 없다. 아니, 답을 '줄 수'는 있지만, 그 답을 '판단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소크라테스가 아고라에서 시민을 붙잡고 물었던 것은 기하학 공식이나 별의 좌표가 아니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2,400년이 지난 지금도 답이 정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이 질문들의 가치다. 답이 정해지지 않은 질문, AI가 대신 답할 수 없는 질문, 삶 전체를 걸고 계속 물어야 하는 질문. 이것이 아테네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다.


1장을 마무리하며, 다시 처음의 두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열두 명이 둘러앉아 "정의란 무엇인가"를 토론하는 세미나실. 300명이 앉아 DNA 복제 과정을 받아 적는 강의실. 우리에게는 둘 다 필요하다. 알렉산드리아 없이 아테네만 있다면, 아름다운 대화는 있지만 축적이 없다. 소크라테스의 통찰은 그가 독배를 마시는 순간 함께 사라졌을 것이다. 아테네 없이 알렉산드리아만 있다면, 거대한 도서관은 있지만 새로운 질문이 없다. 두루마리만 늘어갈 뿐, 아무도 그 두루마리에 "왜?"라고 묻지 않는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교육이 이 균형을 잃었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곳에서 알렉산드리아가 승리했다. 지식은 축적되었고, 체계는 정교해졌으며, 기술은 경이로운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질문하는 법을 잊어가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AI라는 궁극의 알렉산드리아가 등장한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은 다시 아테네로 돌아가는 길뿐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의 시선을 지중해에서 동쪽으로 돌려보자. 아테네와 거의 같은 시기, 지구 반대편에서도 질문이 폭발하던 시대가 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이다. 공자라는 사람이 제자들에게 "인(仁)이란 무엇인가"를 물었고, 제자마다 다른 대답을 들었다. 그런데 그 질문들에게는 아테네와는 전혀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 03화[질문의 역사] 1-2. 알렉산드리아 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