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주석으로 완성하다
12세기, 질문은 완성된 체계가 되었다
1175년 여름, 중국 강서성(江西省)의 아호사(鵝湖寺)라는 작은 절에서 한 논쟁이 벌어졌다.
한쪽에 주희(朱熹)가 앉아 있었다. 마흔다섯 살, 당대 최고의 학자라는 평판을 얻고 있었지만, 관직에서는 번번이 밀려나 지방을 전전하고 있었다. 다른 쪽에 육구연(陸九淵)이 앉아 있었다. 서른여섯 살, 주희보다 젊었지만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논쟁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도(道)에 이르는가?
주희가 말했다. 경전을 읽어야 한다. 사물의 이치를 하나하나 연구해야 한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수양의 길이다. 이것은 점진적이고 체계적인 과정이다. 경전의 구절 하나하나를 꼼꼼히 분석하고, 주석을 달고, 그 의미를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육구연이 반박했다. 그런 식으로는 평생을 걸어도 도에 이르지 못한다. 이치는 이미 내 마음 안에 있다.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마음을 바로 세우면(存心), 그것으로 충분하다. 경전을 백 번 읽어도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소용없다.
이틀간의 논쟁은 결론 없이 끝났다. 두 사람은 서로를 설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역사는 결국 한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주희 쪽이었다. 주희의 체계가 이후 700년간 동아시아의 지적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육구연의 심학(心學)은 300년 뒤 왕양명에 의해 부활하지만, 그것은 나중 이야기다.
아호사 논쟁은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만약 육구연이 이겼다면, 동아시아의 교육은 텍스트가 아니라 마음의 수양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희가 이겼다. 정확히 말하면, 주희의 체계가 과거제도라는 국가 시스템과 결합하면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 결과 동아시아의 교육은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고, 암기하는 것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동아시아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의 상당 부분은 이 순간에 결정되었다.
주희(1130~1200)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남송(南宋) 시대에 태어났다. 남송이라는 시대 자체가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열쇠다. 북송은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 화북 지역을 빼앗기고, 양자강 이남으로 밀려나 남송이 되었다. 중국 문명의 중심부를 '오랑캐'에게 잃어버린 것이다. 이 수치와 위기의식이 남송 지식인 전체를 관통하고 있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약한가?" "문명에서 앞서는 우리가 왜 군사적으로는 지는가?" 이 질문이 시대의 공기였다.
주희는 이 질문에 군사적 답이 아니라 철학적 답을 내렸다. 문제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도덕적 해이에 있다.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이치(理)가 기(氣)의 혼탁함에 가려져 있다. 이 이치를 회복하면, 개인도 바로 서고 국가도 바로 선다. 따라서 가장 시급한 것은 칼이 아니라 수양이며, 수양의 방법은 경전 연구다.
이것이 성리학(性理學)이었다. 주희의 체계를 한 문단으로 압축하면 이렇다. 우주의 모든 것은 이(理)와 기(氣)의 결합으로 존재한다. 이는 형이상학적 원리이고, 기는 물질적 요소다. 인간의 본성(性)은 이를 받았으므로 본래 선하다(이 점에서 맹자의 성선설을 계승한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기로 이루어져 있고, 기에는 맑은 것과 탁한 것이 있다. 기가 탁하면 이가 가려져서 악한 행동이 나온다. 따라서 수양이 필요하다. 수양의 방법은 격물치지, 즉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질문이 생긴다.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나무를 관찰하는 것인가? 물이 흐르는 원리를 탐구하는 것인가? 별의 움직임을 측정하는 것인가?
주희의 답은 아니었다. 격물치지에서 '사물(物)'이란 주로 경전의 텍스트를 의미했다. 경전의 구절 하나하나에 깃든 이치를 연구하는 것이 격물이었다. 자연을 관찰하여 법칙을 발견하는 서양의 과학적 탐구와는 방향이 달랐다. 주희의 격물치지는 자연이 아니라 텍스트를 향하고 있었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훗날 왕양명(1472~1529)이라는 학자가 젊었을 때, 주희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실천해 보기로 했다. 그는 대나무 앞에 앉았다. 그리고 대나무를 응시하며 그 안에 깃든 '이'를 발견하려고 했다. 하루, 이틀, 사흘. 칠일째 되는 날, 왕양명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몸져누웠다. 이 경험이 왕양명으로 하여금 주희의 체계를 의심하게 만들었고, 결국 '이치는 밖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다'는 심학(心學)을 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주희가 죽은 뒤 300년이 지나서야 벌어진 일이다.
주희의 가장 결정적인 업적은 사서(四書)의 편찬이었다.
한나라 이래 유교 교육의 중심 텍스트는 오경(五經)이었다.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이 다섯 권은 모두 고대의 역사, 시가, 의례, 점복에 관한 방대한 텍스트였다. 양이 방대하고, 문체가 난해하며, 직접적으로 사상적 핵심을 말해주지 않았다.
주희는 이 오경 대신, 네 권의 책을 유교의 핵심 텍스트로 뽑아냈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이것이 사서(四書)다. 논어와 맹자는 독립된 책이었지만, 대학과 중용은 원래 예기(禮記)라는 방대한 텍스트의 일부에 불과한 챕터였다. 주희가 그것을 독립시켜 별도의 책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왜 이 네 권이었을까. 주희의 판단은 이랬다. 대학은 유교 수양의 뼈대를 보여준다. 격물치지에서 시작하여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로 나아가는 순서. 개인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에서 출발하여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것에 이르는 웅장한 설계도다. 중용은 그 철학적 기반을 제공한다. 치우치지 않는 중(中)과 변치 않는 용(庸)의 원리. 논어는 공자의 구체적 가르침이고, 맹자는 그 가르침의 심화된 해설이다.
주희는 이 네 권에 주석을 달았다. 『사서집주(四書集注)』라 불리는 이 주석서에서, 주희는 모든 구절의 의미를 확정하려 했다. 논어의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라는 구절을 보자. 원문은 단순하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하지만 주희의 주석은 이 짧은 문장에 상세한 해설을 붙인다. '학(學)'이란 무엇인가, '습(習)'이란 무엇인가, '열(說)'은 왜 '기쁘다'라는 뜻인가, 이 구절이 논어의 첫머리에 놓인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글자에 의미가 부여되고, 그 의미들이 성리학이라는 하나의 체계 안에서 일관되게 연결된다.
2-1장에서 살펴본 장면을 떠올려 보자. 안연이 "인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공자는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라 답했다. 중공이 같은 질문을 했을 때는 다른 답을 주었다. 공자에게 '인'은 열린 개념이었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주희는 이 열린 개념을 닫았다. "인은 마음의 덕이자 사랑의 이치다(仁者, 心之德, 愛之理也)." 명쾌하다. 아름답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정의가 확정되는 순간, 공자가 의도적으로 열어두었던 공간이 닫힌다. 더 이상 "인이란 무엇인가"를 물을 필요가 없다. 주희가 이미 답했으니까. 제자가 할 일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주희의 답을 이해하고 암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공정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주희의 작업은 정말 질문을 죽인 것이었을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주희는 1,500년간 축적된 유교 사상을 정리하고, 체계화하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든 사람이다. 이것은 에우클레이데스가 수백 년간의 기하학적 지식을 『원론』 하나로 정리한 것과 비슷한 업적이다. 흩어져 있던 질문들이 하나의 체계 안에 배열되었다. 모호했던 개념들이 명확해졌다. 학생들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주희 이전에는 유교를 공부하려면 방대한 오경을 읽어야 했다. 주희 이후에는 사서 네 권과 집주를 읽으면 유교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것은 지식의 민주화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은 기하학의 출발점이었지, 도착점이 아니었다. 후대의 수학자들은 『원론』의 체계 위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에우클레이데스의 공리 중 하나를 의심함으로써 탄생했다. 반면, 주희의 『사서집주』는 동아시아에서 출발점이자 도착점이 되었다. 후대의 학자들은 주희의 체계 위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주희의 체계를 더 정교하게 다듬고 확인하는 데 집중했다. 물론 예외가 있었다. 왕양명이 그랬고, 조선의 실학자들이 그랬다. 하지만 주류는 언제나 주희의 체계 안에 머물렀다.
왜 그랬을까. 그 답은 철학이 아니라 제도에 있다.
과거제도와의 결합. 이것이 주희의 체계를 단순한 철학에서 문명의 운영 체제로 격상시킨 결정적 사건이었다.
과거제도는 수(隋)나라(587년)에 시작되어 송나라에서 완성되었다. 시험을 통해 관료를 선발하는 시스템. 혈통이 아니라 능력으로, 세습이 아니라 시험으로 인재를 뽑는다는 원칙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 유럽에서 귀족이 혈통으로 권력을 세습하고 있을 때, 중국에서는 농민의 아들이라도 시험에 붙으면 관료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시험에는 시험 범위가 필요하다. 무엇을 물을 것인가? 어떤 답을 정답으로 인정할 것인가?
원(元)나라 인종이 1313년에 과거제도를 부활시키면서, 주희의 『사서집주』를 공식 시험 교재로 지정했다. 이후 명(明)나라와 청(淸)나라가 이를 계승했고,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주희의 사서집주는 동아시아 전역에서 관료 선발 시험의 표준 교과서가 된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자. 명나라의 어느 시골 마을에 한 소년이 있다. 아버지는 농부지만, 아들만은 출세시키고 싶다. 소년은 다섯 살부터 서당에 간다. 스승이 사서를 펼친다. 논어 첫 구절부터 시작한다. 소년은 소리 내어 읽고, 외우고, 또 읽고, 또 외운다. 스승이 주희의 주석을 설명한다. 소년은 그것도 외운다. 이 과정이 십여 년간 계속된다. 스물이 넘어 향시(鄕試)에 응시한다. 시험관이 논어의 한 구절을 제시하고, 그 의미를 팔고문(八股文)이라는 정해진 형식으로 논술하라고 한다. 소년은 주희의 해석에 근거하여 답안을 작성한다.
이 과정 어디에서 소년이 "나는 주희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디에서 "인이란 주희가 말한 것과는 다른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물을 수 있을까?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쓰면 떨어진다. 시험의 논리가 질문의 논리를 압도한 것이다.
질문이 시험 문제가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질문이 아니다. 정해진 텍스트에 대해 정해진 해석을 얼마나 정확하고 우아하게 재현하느냐를 측정하는 것이다. 공자가 안연에게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라"고 한 그 말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살아 있는 대화에서 떠나, 시험장의 답안지 위에 적히는 고정된 문자가 되었다. 질문의 생명은 열림에 있다. 시험의 논리는 닫힘에 있다. 이 둘이 결합하는 순간, 질문은 죽는다.
주희는 텍스트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삶 자체를 규율화했다.
『주자가례(朱子家禮)』는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법을 정리한 책이다. 태어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인이 될 때 어떤 의식을 거쳐야 하는가, 결혼할 때 어떤 순서를 따라야 하는가, 사람이 죽었을 때 어떻게 장례를 치러야 하는가, 제사는 어떤 형식으로 지내야 하는가. 옷의 색, 절의 횟수, 음식의 종류까지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유교를 철학에서 생활 규범으로 완성한 것이었다. 주희 이전에도 예법은 있었지만, 주희는 그것을 성리학이라는 철학적 체계와 연결시켰다. 왜 부모에게 절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이(理)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왜 장례를 이런 형식으로 치러야 하는가? 그것이 천지의 이치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모든 행위에 형이상학적 근거가 부여되었다. 그 결과, 예법을 따르지 않는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우주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 되었다.
조선은 이 주자가례를 가장 철저하게 수용한 나라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예법의 세부 사항을 둘러싼 논쟁이 정치적 세력 다툼으로 번지기까지 했다. 효종이 죽었을 때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이 수십 년간 싸운 '예송논쟁'이 그것이다. 상복의 기간이라는, 현대인의 눈에는 사소해 보이는 문제가 정치적 생사를 가르는 쟁점이 되었다. 이것은 주희의 체계가 얼마나 깊이 동아시아 사회에 침투했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다.
주희의 체계가 완성시킨 것을 정리해 보자.
형이상학(이기이원론)이 있고, 그 형이상학에 근거한 핵심 텍스트(사서)가 있고, 그 텍스트에 대한 공인된 해석(사서집주)이 있고, 그 해석을 시험하는 제도(과거제도)가 있고, 그 모든 것이 일상의 예법(주자가례)으로까지 연결된다. 우주의 원리에서 아침 식사 때의 절까지, 하나의 체계가 관통하는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지적 성취였다. 서양에서 이에 비견할 만한 것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신학 체계 정도일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 신의 존재에서 인간의 윤리까지를 하나의 논리로 엮은 것처럼, 주희의 체계는 우주의 이치에서 가정의 예법까지를 하나의 논리로 엮었다.
하지만 완전한 체계는 완전한 감옥이기도 하다. 모든 질문에 답이 있다면, 새로운 질문을 던질 이유가 없다. 모든 행위에 규범이 있다면, 규범 밖의 삶을 상상할 이유가 없다. 주희의 체계는 동아시아에 지적 안정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지적 모험의 공간을 좁혔다.
공자가 안연에게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그것은 두 사람 사이의 살아 있는 말이었다. 안연의 성격, 안연의 약점, 안연이 처한 상황에 맞춰 건넨 말이었다. 주희가 그 구절에 주석을 달았을 때, 그것은 보편적 진리가 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 어떤 사람에게든 적용되는 확정된 의미가 되었다. 말은 같은데, 무게가 완전히 달라졌다. 대화가 교리로 변한 것이다.
이제 다음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렇다면 공자는 정말 주희가 해석한 대로 생각했을까? 논어의 공자와 사서집주의 공자는 같은 사람인가? 주희가 12세기의 철학적 렌즈로 기원전 5세기의 대화를 다시 읽었을 때, 무엇이 보존되었고 무엇이 변형되었는가? 그 이야기를 다음에 풀어보겠다.